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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기획자 Apr 01. 2023

내가 빛의 시어터를 좋아하는 이유

빛으로 경험하는 웅장한 예술 경험에 대하여

나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였지만 그림책에 관심이 많았다. 뒤늦게 디자인, 그 후에는 UX를 연구하면서 가끔은 모빌리티에 깊숙이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가끔은 펫 상품에 대해 몰두하기도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여행작가의 문을 두들기며 매일 새벽마다 글을 쓰기도 했다. 어떤 한 분야를 진지하게 파고들지 못하고 여러 관심사와 직업군을 노크할 때면 스스로 나의 정체성에 혼란이 생기곤 한다.



기획 업무를 오랫동안 몰두해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여행글을 써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때론 교수님들께 내 이름으로 나온 저서를 떳떳이 소개하지 못할 때도 많다. 혹여나 전공분야에 대한 논물 글 한 줄도 쓰지 않으면서 여행글을 썼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는 우려가 되기 때문이다. 모임을 가도 마찬가지이다. 그림책에 관심이 생겨 1년 동안 그림책 학교를 다녔지만 동료들과는 약간의 이질감이 느껴졌다. 온전히 그림책만 바라보는 이들과 한 다리 걸쳐있는 사람 간의 간극이라고 해야 할까?


상황이 이러하니 오프라인에서는 가까운 가족 외에는 이러한 이중생활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편이다. 가끔 그림도 그리고, 기획도 하고, 여행책도 쓰고, 디자인도 하고, IT 칼럼도 쓴다고 하면 기이하게 보거나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오프라인에서는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할 수 없듯 내가 하는 일을 확실하게 표현하기가 어렵기에 입을 다물고 그 세계에 속한 사람들 속에 묻어간다. 대신 오프라인에서 말하지 못한 속내를 온라인 속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SNS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나를 드러내고, 블로그를 통해 여행하며 글 쓰는 나를 드러낸다. 이렇게 자연스럽지만 진지한 자세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표현하기 시작하고 그 콘텐츠가 10개, 100개 쌓이게 되면 조금씩 나의 터전이 생기게 된다. '난 이런 사람이야.'라는 색깔을 계속 보여주고 다듬어가면 어느덧 나의 터전에는 내 생각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여행 인스타그램에 그림을 접목해 여행툰을 올리면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UX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 글을 올리면 함께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적은 사람들이지만 조금씩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알게 되고 만나게 되면서 정체성에 의미를 조금씩 부여하고 있다.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복잡한 UX전략도 만화로 표현을 할 수 있을 거야.'

'여행도 좋아하고 그림책도 좋아하니 여행 그림책을 만들면 재미있겠다.'


뭐 하나 전문적인 분야가 없다는 약점으로 자신감이 없었지만 좋아하는 것들을 계속 추구해 오니 어울리지 않은 관심분야들이 합쳐져 독특한 창작물을 만들 수 있겠다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 분야에 깊이 있는 대가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접근성이 좋은 준전문가 정도는 될 수 있었다. 서로 각기 다른 장점들은 모여 또 다른 새로운 창작과 시너지를 만들게 되었고 특별함을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한 사람의 개성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 나가는 것에 따라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 역시 낯설지만 독특한 개성을 지닌 곳이 있다. 빛의 시어터가 그러하다. 국립 현대 미술관이나 덕수궁 미술관처럼 전통적이고 전문적인 미술관이라고 설명하기도 어렵고 예술의 전당의 클래식 공연장처럼 전문적인 공연장이라고 설명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빛으로 그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한 미술 감상을 해볼 수 있다. 빛과 음악으로 역동적인 미술 작품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림을 이동시키거나 크기를 변화하여 전시를 보여주기도 한다. 빛의 크기와 움직임, 생생한 색감 등이 조화를 이뤄 신선하고 몰입할 수 있는 예술 감상을 만들어 낸다.




전시는 비정기적으로 한 번씩 돌아가며 진행을 한다. 압도적인 스케일을 갖춘 복합 예술 공간은 총면적 약 1,000평, 최대 높이 21m의 웅장한 규모에서 관람객들의 예술 감상을 돕는다. 압도적인 규모감과 한때 대극장이었던 장소의 몰입감을 살려 전시나 공연의 입체적이고 깊이 있는 관람을 도와준다. 구스타프 클림프, 이브 클랭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들이 음악에 맞춰 율동감 있게 펼쳐진다. 경직되고 무거운 예술 전시와는 다르게 어린이들이 전시 공간에서 음악과 미술 작품에 맞춰 춤을 추기도 하고, 극장 의자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기도 한다. 본인이 가장 본인다워질 수 있는 감상법으로 전시를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공간을 배려한다.


압도적인 스케일만 가진 공간은 많고, 스피커가 잘 나오는 공간도 많다. 하지만 공연 공간과 미술 작품이 '빛'이라는 테마로 동시에 연출되어 감상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신선하고 독특함을 안겨주는 장소들은 어쩌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테마들의 조합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정체성에 많은 혼란을 빚었던 나도, 나와 비슷한 누군가도 정체성과 전문성에 조금은 자신감을 갖고 본인의 개성을 믿으며 지속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영감은 서로 다른 데서 피어나기에 다른 나만의 특징들을 보다 소중히 여기고 가꿔 나가는 삶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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