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하는 기획자 Apr 10. 2023

공간은 힘이 있다, 학산 숲 속 도서관

나에게 영감을 준 공간

엄마가 잠깐 편찮으셨을 때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평생 타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시는 직업을 갖고 계신지라 정작 엄마가 아플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고통의 크기를 0부터 100까지 수치화한다면 당시 나의 고통은 80에서 100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컸다. 두려웠다. 내가 대신 아플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바라보는 것과 같이 입원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병원 병실에 입원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병실에는 가운데 글자가 가려진 이름과 나이가 붙어있었다. 연세가 많으신 분도 계셨지만 의외로 30대, 40대 환자들도 보였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도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니 슬픔, 절망, 안타까움 등의 

평소 느끼지 못한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병원에서 잠을 자려고 할 때 갑자기 긴급 상황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가까이서 들리는 가족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면 생판 모르는 남인데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죽음'을 잊고 살아온 나로서는 병원에 있는 동안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선명하게 하게 된 계기였다. 긴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 한동안 책을 읽지 못하는 상황까지 왔을 때 '시집 도서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지난 후 마음에 여유가 조금은 생겼을 때 어딘가에 꽁꽁 숨어 조용히 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때 언뜻 떠올린 장소가 '학산 숲 속 도서관'이었다. 전주 도심에서도 약 30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해야 나오는데 주변에 기도원이 있을 정도로 외딴곳에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게다가 주차를 하고 도서관이 바로 보이는 게 아니라 오솔길을 걸어야 만나볼 수 있는 장소이다. 


여느 도서관과 다르게 이 도서관은 산속 은둔처처럼 통나무집으로 만들어졌다. 유리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면 햇볕과 함께 깊은 산속 어딘가를 감상할 수 있다. 선반은 시집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처음 시집을 읽는 사람도 낯설지 않도록 키워드를 제시하고 있다. 어떤 선반에는 책 표지가 그대로 보이도록 배치하고 있었는지 시집의 제목과 표지만 봐도 호기심을 불러일으킬만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이를테면 '바다로 가득 찬 책'이나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와 같은 시집은 시라곤 눈곱만치도 모르는 내게 관심의 스펙트럼을 넓혀 주었다. 제목만 들어도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책 몇 권을 골라 도서관에서 읽을 공간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은 1층과 2층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어디든 공간이 아늑하고 포근해 자유롭고 편안하게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 특히 2층은 다락방처럼 꾸며 놓아 편안하게 누워서 책을 읽을 수도 있어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다. 나 역시 공간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구석에 걸터앉아 시집을 꺼내 읽었다. 나태주 시인의 '혼자서', 류시화 시인의 '슬픔이 그대를 부를 때'와 같은 시를 읽으면서 천천히 각 단어와 문구를 숙고하고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글을 읽지 못할 정도로 머리가 복잡했지만 '시'라는 장르를 만나니 어려운 상황에서도 현재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어떤 공간에 있느냐, 어떤 환경에 있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과 행동은 달라진다. 병원에 있는 동안은 아프고 위급한 환자들을 보며 서글픔, 두려운 감정을 느낀다. 나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점 역시 생전 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 처음으로 깊게 고찰했던 이유는 내가 병원이라는 공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힘든 감정을 치유하며 다시 현실로 복귀시키며 때론 시집을 꺼내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 것도 역시 공간의 힘이다. 공간은 분명 사고에 전환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 그렇기에 내가 자주 가는 장소, 나에게 특별한 장소를 더욱 중요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빛의 시어터를 좋아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