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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기획자 Jun 21. 2023

강원도에서 횡재한 장소

인제 여초 서예 서예관을 다녀오다 


가끔 이렇게 좋은 장소가 서울에 있다면 사람들이 미어터질 텐데, 지방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무척 한적하게 장소를 감상할 수 있는 여행지가 있다. 이런 장소를 만나면 그야말로 횡재를 한 것이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전세 낸 듯 여유롭게 감상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강원도 인제라는 산 중턱에 위치한 여초 서예관은 수도권에서 찾아가기가 제법 까다롭지만 도착한 순간 명망 높은 건축상을 받은 공간을 고요히 생각을 다듬으며 살펴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 




'서예'라는 이름이 붙어 괜히 고리타분하거나 지루할 것이라 지레 겁을 먹을 수 있지만 자연과 조화된 건축물과 꽤 재미난 프로그램으로 그런 우려를 단번에 무너뜨린다. 일단 건축물에 도착하면 건축에서부터 정적인 미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물, 텅 빈 공간, 곧은 건축관이 자연과 어우러져 강인하면서도 여백이 느껴진다. 입구 주변에는 얕은 물이 담긴 정원이 있는데 '여초서예관'이라는 팻말과 함께 이 공간의 주인공이신 '김응현 선생님'의 작품이 건축물에 새겨져 있어 그림 위에 그림이 올려져 있는 것만 같다. 수직적으로 분리된 각 공간 사이로 은근히 주변의 자연경관이 드리워져 건물과 자연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듯한 모습을 띄고 있다. 서예를 1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공간을 감상하더라도 누구나 공간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단정한 멋이 있다.  



여초 서예관은 근현대 한국서예사의 대가로 평가받고 있는 '김응현 선생님'의 작품이 깃든 장소이다. 김응현 선생님이 어떻게 서예 공부를 하게 되었는지 어린 시절부터 그가 필서 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단순히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 최종 작품들만 보여준다면 형식적이고 재미없는 관람이 되었을 텐데 직접 사용했던 붓, 먹, 공부했던 필서본, 하다못해 생전에 사용했던 라이터와 재떨이까지 전시를 하니 더욱 흥미롭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중간중간 서예에 대한 일화도 전시실 어딘가에 적혀 있는데 오른손이 다치셨을 때 왼손으로 서예를 했던 일화나 중국과 교류를 했던 일화 등은 한적한 공간이 주는 또 다른 기쁨이다. 



서예는 글자 자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있으면서 더불어 글자에 담겨있는 사상과 정신을 다시 한번 음미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런 이유로 서예 글씨를 연습하면서 잘못된 사상이 정신에 깃들거나 타인의 사상에 의존하게 될 수 있어 어떤 글을 쓸지 정하는 자체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문제라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단순히 글자를 기교로서 '잘 쓴 것 같다.'라고 판단을 해버렸지만 서예의 가치를 간접적으로 엿보면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매우 예술성이 농밀한 분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예에 대해 일자무식인 나도 생각을 전환하고 관심을 갖게 된 데에는 건축물이 주는 탄성과 함께 체험 활동이 한몫을 하였다. 고리타분할 것이라 생각하였던 서예 콘텐츠를 직접 모니터에 대고 원하는 글자를 따라 써볼 수 있게 구성하였다. 워낙 조용하게 감상을 할 수 있는 공간이라 뒷사람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여유롭게 필서를 해볼 수 있다. 대형 화면서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필서를 하는 사이 자연스럽게 서예에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아울러 어떤 형태로든 '서예'라는 장르를 마주하는 순간 기존의 경험들과 융합되어 문자 예술, 그림, 시 분야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여행을 통해 거창할 정도로 인생이 달라졌다고 할 순 없지만 확실히 생각의 지평을 넓혀준 건 사실이다. 계속해서 낯선 것들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이다. 서예만 해도 초등학교 미술 시간 이후로 좀처럼 마주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공간을 이동하다 보니 '서예'라는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자연스레 내가 그동안 배웠던 캘리그래피, 수채화 등과 연결을 시키면서 새로운 작품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어쩌면 새로운 생각은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경험과 자극들이 촉매제가 되어 기존의 경험들과 연결이 될 때 나타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공간의 순수한 부분, 아름다운 부분, 인상적인 부분은 공간을 마주했을 때보다 떠나고 혼자 생각했을 때 전해지고 느껴진다. 처음에는 '수도권에 있다면 이 장소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찾는 장소일 텐데...'라는 아쉬움과 조용히 볼 수 있다는 안도감으로 장소를 대하였다. 관람을 마치고 어찌 보면 조용히 사색하고, 여유롭게 자연을 감상하며 낯설지만 감상할 점이 많은 서예를 접하려면 강원도 산골마을에 위치한 점이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찾기도 쉽지 않고, 가기도 쉽지 않지만 삶이 팍팍해졌다고 느껴졌을 때, 생각을 잠시 덜어내고 싶을 때 공간 안에서 오랫동안 건축물을 바라본다면 공간이 위로를 건네주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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