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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하는 기획자 Jul 18. 2023

책러버들의 성지, 삼례 책마을

중고책, 고서, 그림책, 책에 대한 장소

내가 살던 집 옆에는 수년째 운영되던 서점이 하나 있었다. 규모가 꽤 큰 서점이라 어린이 코너부터 잡지, 문제집 코너까지 준비되어 있어 시간만 있으면 서점에 놀러 가곤 했다. 서점은 내 마음대로 연예인들이 나오는 잡지책부터 만화책까지 읽을 수 있어 세상에서 둘도 없는 놀이터였다. 서점에서 일하는 언니, 오빠들하고도 친해서 잡지 부록이 있으면 하나씩 챙겨주셨다. 스티커, 브로마이드 등 각종 인쇄물을 하나씩 얻어올 때마다 늘 마음은 풍족했었다. 서점이 집 옆에 붙어있어 책을 꽤 가까이서 접하였고, 게임대신 책을 읽는 내 모습이 기특해 부모님께서는 흔쾌히 책을 여러 권 선물해 주셨다.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면서 나의 놀이터였던 서점도 문을 닫게 되었다. 동네에 서점이 한 군데, 두 군데 사라지기 시작하였고 이제 마음먹고 대형 쇼핑타운에 가야 서점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어렸을 적 놀이터와 같았던 서점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있어서일까 어느 지역을 가도 서점을 찾게 된다. 가끔 서점에 앉아있는 꼬마를 보면 문득 옛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런 내가 책마을이 있다는 동네를 어떻게 모른 척 지나칠 수 있을까. 삼례는 전주 옆 조그만 시골 정도로만 생각하여 자주 들릴 생각을 못했다. 우연히 전주를 가는 김에 삼례에 책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번에 찾아갔다.



삼례 책마을은 낡은 양곡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이다. 1999년 설립한 영월책박물관이 거대한 양곡창고에 이전하면서 '책'을 중심으로 테마공간이 형성되었다. 영국 웨일스에도 탄광촌이 Hey on Wye라는 이름의 책마을로 재탄생하였는데, 책마을은 이러한 장소들을 벤치마킹하여 만들어진 공간이다. 책마을에는 옹기종기 북하우스, 북갤러리, 책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위치하고 있다. 책마을의 중심 공간은 '북하우스'이다. 고서점, 헌책방, 카페로 구성된 북하우스는 1960년대 출판된 고서적부터 구하기 힘든 각종 절판된 소설책들로 이루어져 있다. 1950년대 잡지까지 볼 수 있어 장서의 내용만 보더라도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는 것만 같다. 약 1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어 책들의 목록만 보더라도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엄청난 규모의 장서는 발끝부터 천장 꼭대기까지 목이 꺾일정도로 빼곡하게 꽂혀있어 보기만 해도 웅장한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옛 고서들은 모두 구매를 할 수 있다. 어릴 적 서점에서 읽었을법한 만화책부터 엄마가 잠자기 전 읽어주는 책까지 옛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책들이 한아름 소장되어 있어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책을 하나씩 들춰보다 보면 시간이 가만히 멈춰있는 것만 같다. 책뿐만 아니라 LP판도 구매를 할 수 있다. '남행열차'를 부른 '김수희' 가수부터 90년대 가요계를 재패하였던 '김건모'의 1집 LP판까지 만나볼 수 있어 추억을 그대로 소환시킬 수 있다. 2층에는 책과 함께 과거 어딘가 그 시절을 연상시킬 수 있는 교과서, 지도, 장난감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아련한 추억에 이끌려 책을 구매한 뒤 천천히 책을 읽고 싶다면 내부 카페에 가서 책을 읽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다. 북카페에는 완주의 로컬푸드 베이커리가 있는 특별한 북카페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편안하게 독서를 할 수 있다. 음료와 베이커리류가 대체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이며 커피, 차, 브라우니, 마카롱 등 메뉴도 다양한 편이다. 특히 카페 메뉴는 삼례 로컬 농작물로 만든 베이커리류를 판매하고 있어 특별한 한 끼 식사를 맛볼 수 있다. 


옆 건물에는 책 박물관이 있다. 무인 서점과 전시실로 구성된 책 박물관은 '책'과 '문학작품'에 대한 주제로 전시를 이어가고 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작가의 작품을 주로 선정하면서도 작가의 면면을 알아볼 수 있는 깊숙한 자료를 선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작가의 필서가 담긴 편지나 당시 발간된 초판본을 소개해 문학, 책 마니아라면 틀림없이 좋아할 전시를 보여주고 있다. 


책 마을에서 걸어서 몇 블록정도 이동을 하면 아기자기한 그림책 미술관이 보인다. 그림책미술관도 책마을과 같이 양곡창고를 개조해 만들어 구조가 이색적이다. 국내 최초의 그림책 미술관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지듯 곳곳에 외관과 실내가 아기자기한 그림책 캐릭터로 꾸며져 있다. 특히 실내에는 수많은 인형들과 캐릭터들이 있어 동화 속 화면을 그대로 구현한 것만 같다. 그림책 미술관에서는 유명 그림책 작가들을 주제로 꾸준히 전시활동을 하며 책에 대한 흥미를 계속 불어넣어 주고 있다. 그림과 활자, 조각들이 한데 어우러져 동화 속을 거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책마을에서 책의 향기와 물성에 흠뻑 취하게 된 날, 오랜만에 몇 시간이고 진한 집중을 하게 되었다. 한동안 책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핑계겠지만 내 주변에 온갖 화려하고 현란한 콘텐츠들이 많아 책에까지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콘텐츠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상대적으로 생각을 할 시간이 짧기에 그저 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콘텐츠를 그저 받아들이고 있었구나.'라는 경각심이 생기면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어진다. 


얼마 전 친한 동생이 AI가 그려준 그림이라면서 귀여운 하마 그림을 보여줬는데, 너무나 그림이 훌륭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수년동안 그림을 공부한 나보다 인공지능이 3분 만에 그린 그림이 더 잘 그릴 수 있다는데서 허무한 감정도 느껴졌다. 지식의 총량, 기술의 구현 범위가 인간과 대등해지거나 계속 더 나아가는 인공지능을 바라보면서 결국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앞으로 절실해질 거라 본다. 내가 나만의 강점을 위해 계속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나만의 취향이 담긴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나의 생각을 뾰족하게 다듬어 나가는 것이 아닐까? 모처럼 삼례책마을에서 옛 추억이 담긴 책들을 바라보며 나의 취향을 발견하고, 내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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