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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수현 May 04. 2021

중경삼림에서 화양연화를 부르다

왕가위 유니버스의 이야기

*아래 글은 중경삼림과 화양연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짧은 식견을 넓히는 가장 쉬운 방법중 하나는, 친구나 지인에게 추천받는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다. 평소에 상대방의 취향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상태에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추천한다는 행위는, 어느정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추천하는 자신을 이해하는 창구를 열어주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게 접하게 된 왕가위 감독의 영화가 화양연화였다. 


  화양연화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에게 그 단어를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성숙함, 정제됨, 정적인, 가리워진 선명함 등을 고를 것 같다. 왕가위 감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장점들 중에서도 최고로 여겨지는 미장센의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 화양연화는 단순한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의 변화를 그 정적인 연출과 구도 안에서도 한껏 부어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 때문인지, 화양연화에 등장하는 사건과 캐릭터들은 직설적인 표현을 굉장히 절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의 상대와 마주하는 순간에서도 그 많고 많은 감정표현은 극도로 자제되고 두 주인공이 각자 힘든 순간을 마주할때 조금 더 버티기 쉽게 연습하는 역할극에서나 그나마 감정적인 대사와 행동들이 표출된다. 아이러니한것은 영화안에서 벌어지는 역할극이라는 사실 자체가 관객들에게 감정과 행동들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을것이라 생각하게 하고 시나리오 흐름과 유리시킨다.


  이런 정적인 흐름과 감정의 절제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상황적인 설정은 둘은 각자 결혼한 상대가 있기 때문. 그리고 이미 결혼생활을 몇 년째 이어온 만큼 나이가 적지 않고 그저 감정을 따라 달려가서는 파국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서로의 배우자와 바람이난 상대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을테고. 이런 절묘한 관계설정 덕분에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연출은 극도로 자제되었다. 그저 하나의 프레임안에 두 인물을 담아낸다.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하고도 복잡한 기류. 손짓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집중감. 서로 솔직할 수 없기에 더욱 아슬아슬한 대화 마디들. 이런 요소들이 화양연화를 잊혀지지 않는 작품으로 올려둔 요소들이었다.


  반대로 중경삼림은 화양연화에 비해 솔직한 모습들을 많이 그린다. 홍콩의 좁은 멘션과 시내 거리를 오가며 벌어지는 사건들. 그 안에서 사랑과 이별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키워드를 꼽는다면 솔직과 미련 그리고 관점. 인트로 시퀀스부터 거리낌없이 사랑에 빠진다고 말하는 남자. 그리고 지나간 사랑에 쩔쩔매며 파인애플을 30캔씩 까먹는 미친짓. 그리고 눈에 띈 매력적인 새로운 여자에게 부끄럼없이 시도하는 구애까지. 화양연화에 비해 배우들의 나레이션 또한 빈번히 사용되는데, 조금은 동적이고 정신없는 촬영기법에서 오는 감정의 간극을 메꿔주며 솔직한 속마음을 관객에게 바로 전달해주는 메신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마치 어린 시절의 사랑들처럼 감정을 감추고 미묘한 선을 넘나든다기 보다는, 행동하지는 못하더라도 내 감정은 확고하게 알고 있는 인물들이 중심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중경삼림의 인물들이 매력없는 사랑을 이어나가지는 않는다. 관객에게 솔직할 뿐 사랑의 대상에게는 마치 우리의 모습처럼 소극적이고 뻔히 보이는 본심을 애써 뒤로 숨기기도 한다. 어쩌다 본심을 들키거나 혹은 자신이 절박한 상황에 처한다면? 좋게 말하면 미련이지만 소위 말해 찌질하고 창피할만한 모습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런 현실감 있는 모습이 오히려 멋지기만한 모습보다는 몰입하기 쉽고 자신을 투영하게 만들기도 한다.


  미리 같은 감독이라는걸 알지 않았더라면 다른 사람이 만들었다 해도 믿을만한 두 작품. 무엇을 고르던 경계에 서있던 그들의 모습을 엿보기에는 충분하고 아마, 홍콩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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