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맡겨진 소녀'를 읽고
나는 매년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그래서 사랑을 갈구하는, 그저 학교에 맡겨진 아이들을 만난다. 아이들은 내가 담임이라는 이유로 생각보다 쉽게 마음을 열고, 소녀와 달리 말 많은 어린이들은 온갖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 숨겨진 가족의 삶을 어쩔 수 없이 엿보고야 만다. 아이들의 문제는 대부분 가정에서 시작된다.
3년 전 우리 반에 무서운 소문?을 달고 온 여자 아이가 있었다. 고작 2학년인데 이미 입학과 함께 학교 전체에 악명을 떨친 아이였다. 온라인 수업을 듣는 아이의 모습, 그 뒤로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아이가 자라온 환경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소녀와는 사뭇 다르지만 비슷한 이 아이가 떠올랐다.
아이의 하루하루는 주변 친구들과의 싸움으로 가득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친구에게조차 친절한 말 한마디를 못 하고, 늘 짜증을 내거나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리기 일쑤였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해서 누군가와 친해지는 법을 몰랐던 아이의 관심 끌기 전략은 떼쓰기와 어그로 끌기였으나 투정 속에 숨겨진 갈구를 이해하고 받아줄 만큼 성숙한 초등학교 2학년은 없었으므로 아이는 늘 외로웠다.
여느 날처럼 소란스럽던 급식시간, 식사를 하던 아이가 갑자기 구역질을 하더니 구토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황스러웠지만 이걸 평생의 놀림거리로 만들 순 없다는 생각에 최대한 태연하려 노력했다. 화장실로 얼른 보내 입 안과 옷을 닦게 하고, 식판과 바닥을 정리했다. 돌아온 아이는 바닥을 닦고 있는 내 옆에서 쭈뼛거렸다. 나는 “속 괜찮아? 원래 속 안 좋으면 토하는 거야. 시원해? 그럼 됐어”라며 별 일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이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못 했다. 속좁은 나는 ‘애써서 치웠는데 말야, 고맙다고 인사도 못 하냐’라고 생각했다.
다음 날, 급식시간 아이는 밥을 먹다 말고, 나를 불렀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가관이었다.
‘선생님, 저 오늘도 토할 거예요.’ 장난섞인 말투였다.
듣는 순간, 어제의 뾰루퉁했던 마음이 떠오르고, 화가 나 꿀밤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꼬여있는 저 말 뒤에 숨겨진 아이의 마음을 생각했다.
좋았구나. 사랑받는다고 느꼈구나. 책망하지 않아 줘서 그냥 말없이 자신의 실수를 닦아주고 덮어주어서 안심했구나. 그래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
안타까웠다. 어제 그 상황에서는 고맙다고 말 한마디를 못하고, 이렇게 울퉁불퉁 못난 말에 숨겨서야 표현하는 그 아이가...
나에게는 이 아이의 삶을 바꿔줄 능력은 없었다. 내가 교실에서 무얼 해주는지에 관계없이 아이는 사랑이 고픈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 날 잔뜩 인상을 구긴 채 교실에 들어섰다.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서 소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아간 후의 소녀의 삶이 궁금했다. 여전한 아빠와 더 늘어난 식구들과 살아내야 할 앞으로의 삶이 걱정스러웠다. 킨셀라 부부와 함께한 여름을 기억하며 버틸 수 있을까.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따금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또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애정을 주고받으며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그 아이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 이 독후감을 끝내고 나면, 나는 또 한참은 그 아이를 잊고 지내겠지만 그래도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