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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바닥 Aug 25. 2023

가끔 드는 위험한 생각,

너무 완벽한 하루 끝에 죽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벌써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와 각자의 인생을 살며 생사안부를 묻다 보니 어느덧 함께 알고 지낸 세월이 곧 10년이다.


얼굴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빼놓지 않고 이 말을 주고받는다

"와~ 오래 봤다 진짜 오래 봤어"


사실 그 친구와는 그리 친하지도, 그렇다고 그리 가깝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월 속에 살다 보니, 이런 어영부영한 사이가 오히려 오래간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친구는 성격이 좋다. 그러니 나같이 대인관계 스킬이 부족한 사람 곁애서도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오래 버티고 있다. 그는 어떨 때 보면 꼭 동생 같다. 딱딱하지 않은 사람이라 그럴까? 적당히 부드러운 리액션과 높은 목소리 톤은 항상 주변을 들뜨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오랜만에 만나, 지나간 시절의 수다와 앞으로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각자의 삶에 서서, 전혀 같은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우리이기에, 대화는 이내 길어지지 못하고 딴 길로 샜다.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 예를 들자면 '인어공주의 악당, 마녀는 사실 착한 사람이다'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하등 우리의 인생과 전혀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대화거리가 떨어진 우리는 함께 길을 걸었다. 근처에 경희대 캠퍼스가 있었다. 건물이 멋있기로 소문난 경희대를 구경하고 싶기도 했다. 입구부터 멋들어진 동상과 함께 시작된 캠퍼스 투어는 우리를 대학시절로 돌려놓았다.



캘퍼스의 낭만, 그래봤자 뭐 별거 있나. 술 먹고 잔디밭에 누워있던 이야기, 어떤 선배가 고백했던 이야기, 쓸모없는 과잠을 샀던 이야기... 추억팔이를 하며 열심히 건물 곳곳을 누볐다.


"주차 시간 다 끝나간다. 가야 해"


친구의 문장을 끝으로, 잠깐 20대 시절로 돌아갔던 우리의 감성도 제자리를 찾아왔다. 학생시절엔 '차'라곤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넓은 캠퍼스를 두 발로 걸어 다녔다. 이젠 자동차가 있어서 다리는 바퀴로 바뀐 지 오래였다.


너무 걸었나? 인어공주가 목소리를 주고, 다리를 처음 가져왔을 때 제대로 걷지 못했던 것처럼, 친구와 나도 힘겹게 경희대 정문으로 향하는 언덕을 넘어갔다.


가끔 너무 일에 함몰되다 보면 사람이 여유를 잃는다. 잃어버린 여유는 집 나간 며느리처럼, 전어를 굽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는다. 내게 그 친구는 마치 전어 같은 존재다. 만나고 오면 여유가 내품으로 돌아온다.  


'나 이만 돌아갈게, 들어가'


이 날은 내가 그의 집 근처까지 갔던 날이다. 그를 보려고 그곳에 간 건 아니었다. 마침 볼일이 있어서 들렀던 곳이 그의 집 근처였고, 당연하다는 듯 약속을 잡았다.  


횡단보도의 빨간불이 초록불로 바뀌고, 잠시나마 인생에서 멀어져 여유를 찾던 우리도 제자리를 향해 건너갔다.


참, 완벽하게 좋았다.

적당히 오래된 친구와 만나 성냥팔이처럼 추억을 팔고, 서로의 추억을 사주며, 웃고 떠든 날.

되고 싶은 미래를 그리며, 서로 응원을 주고받은 날.


초록불이 다시 빨간불로 변했다. 너는 길 건너편에서 너의 목적지로 향해 갔고, 나는 잠시 그 너머에서 멈춰 섰다.  들뜬 너의 목소리도, 마냥 타들어 갈 것 같던 추억들도 꺼졌다. 주변은 어두웠다. 밤이 되었다.


갑작스레 찾아온 고요한 적막에 생각했다.

이렇게나 완벽한 하루였다면.. 그 하루가 마무리되어 갈 때쯤, 그 찰나에 마침표를 찍고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아무도 찾지 않는, 밤의 순간들이 나를 마저 메워버리기 전에 이대로 끝내고 싶다고.


그렇게 된다면, 완벽한 하루를 쟁취한 채로 영원할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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