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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바닥 Aug 25. 2023

분위기 좋게 네가 차 좀 따라봐

하지만 그 누구도 직접 가서 따지지 못했다.

분위기 좋게 네가 차 좀 따라봐.

하지만 그 누구도 직접 가서 따지지 못했다.




오늘은 회사 이사회 날이었다. 높으신 분들이 많이 오는 그런 자리, 새로 오신 프로님이 그분들을 위해 직접 우린 차를 준비했다.


부서 내 직원들은 이사회 준비로 분주했다. 디자이너인 나는 딱히 도울일도 없고 오전에 다른 업무가 있어서 행사준비를 참여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여직원이 자리로 돌아왔다. 격양된 톤에서 무슨 사달이 났음을 알아챘다.


"프로님이 제게 차를 따르라고 시켰어요"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차 심부름을 시킨 거였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누구 한 명은 회의를 위해 간단한 음료와 다과를 준비해야하닌깐. 하지만 뒷따라 오는 말이 문제였다.


" '그래야 분위기가 살지' 라고 말하면서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여직원에게 차를 따르라고, 그것도 네가 따라야 분위기가 산다고 말한단 말인가!


"언어는 습관이라더니, 회의하는 곳에서 저러면 평소엔 얼마나..."


순식간에 소란스러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녔다. 이전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했던 일들이 뭉개 뭉개 머릿속에 피어났다.

하지만 말을 아꼈다. 아직까진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네가 그럴 만 했으닌깐 그랬겠지'라는 꼬리표가 붙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아마 내게 성희롱을 했던 그 상사는 지금 기억이나 할까?


성희롱 사건이 있도 다음날, 상사에게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그는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든 직원 앞에서 선수를 쳤다.


 "내가 어제 많이 취했나 봐, 필름이 끊겨서 기억이 안 나네"


오늘 사건의 주인공인 프로님은, 언어 습관처럼 내뱉은 저 말을 기억하지 못할 테지.


아마 내 상사가 아무것도 기억을 못 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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