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1 일중독자가 일에 보람을 잃어버렸을 때

그래서 전문성은 어디로 사라진 거죠?

by 손바닥

나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다. 안 바쁜 적이 없어서 한가한 것에 익숙하지 않다. 쉰다의 개념과 일한다의 개념이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 그걸로 아마 나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일에 목을 맨 건, ‘프로페셔널’ 한 커리어 우먼에 대한 로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높은 킬힐을 신고 쉴 틈 없이 오는 전화를 받으며, 수많은 일들도 척척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 누구에게나 ‘저 사람 참 잘해’,’저 사람이랑 일하면 뭐든 해결돼’라고 불리는 마법사 같은 사람이 내 목표였다.

일하는 게 즐거웠고, 노는 것보단 일하는 게 재밌었다. 친구들과도 업무적으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고 그것이 분명 나의 성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을 하면서 몰랐던 분야에 대해 알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교류하는 게 항상 즐거웠다.


현 회사에 입사하고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소기업에서 대기업으로 이직했더니, 업무량은 확연히 줄어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양한 분야에 경계 없이 일하던 소기업과 달리, 대기업에서는 일정한 포지션이 주워지고 그 안에서만 일하기를 강요받게 되었다. 어찌 보면 회사 규모의 차이가 가져오는 업무 분위기의 변화였다. 2년째 같은 업무를 계속하고 있으니 어째 발전이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요즘이다.


확실히 큰 회사여서 좋은 점도 많다. 심지어 다들 오고 싶어 하는 공기업, -준공무원이라 불리며 칼출근과 칼퇴근을 보장받는 회사!-이지만 알게 모르게 나의 불만은 계속 쌓여만 가고 있다. 일단 공기업인만큼 사기업과 달리 분담되는 업무들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못해 알쏭달쏭 하다. ‘니 일도 내 일도’ 아닌 일들이 너무 많다. 나는 지금 디자이너로 회사에 근무하고 있지만, 이상한 문서들을 내가 다 올린다. 예를 들면 ‘마케팅 홍보를 위한 블로그 바이럴 매체 선정’ 같은 문서를 내가 올린다. 나는 디자이너인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일단 까라면 까야하니 올린다. 그리고 결국 홍보 일도 내 일이 된다. 문서를 올리면 그 순간부터 그건 그 사람일이 된다. 그것뿐만 아니다. 서비스 항의 전화를 하는 소비자를 상대하는 일도 내가 진행해야 한다. 왜냐고 하면, 아무도 그 일을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안 하는 일은 사실 내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니 일도 아니니, 눈치싸움에서 진 사람 일이 된다.


일이 많은 게 싫은 건 아니다. 그것보단 일을 할 때는 전문성 운운하며 참견하지 말라는 식으로 그어버려 놓고 누구도 하기 싫은 일은 결국 떠밀려 밀려 내게 온다. 그리고 그 일이 뭐가 어렵냐는 식의 말투와 행동들이 싫다. 중요하지 않은 일=쉬운 일이 아닌데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으닌깐 쉬운 일로 치부해버린다. ‘니 일도 아니고 내 일도’ 아닌 그 일들을 열심히 하는 사람만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 내가 딱 요즘 느끼는 기분이다.


디자인이 뭐가 어렵냐고 한다. 전화받는 일이 뭐가 어렵냐고 한다. 그게 왜 오래 걸리냐고 한다. 네가 왜 바쁘냐고 한다.


한마디 한마디가 서로의 전문성을 높이기보단 깎아내리는 기분,

슬슬 그만 느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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