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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ric Apr 01. 2020

Paranoid

모두가 잠에 드는 시간이다.

소리가 없는 상태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어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게 TV 음량을 10 이하로 설정한다.

이제 내 공포를 상쇄하기 위해 내게만 들리도록 밤새 떠들어주는 건 얘 하나겠지.

아직은 쌀쌀한 탓에 전기장판을 약하게 틀어두고 스탠드와 가습기가 연결된 멀티탭 스위치를 누른다.

스탠드는 약하게 켜고 가습기를 튼다. 가습기 밑에 있는 작은 조명도 켜 둔다.

이제 거실 불을 끄고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더 이상은 사용하지 않는 휴대폰 공기계로 블루투스를 켜고 블루투스 스피커 전원 버튼도 누른다.

둘이 연결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소리가 난다.

빗소리를 재생해주는 어플을 켜서 시골에서 들을 수 있을 법한 빗소리를 재생한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날씨에도 내 방안에는 늘 빗소리가 울려 퍼진다.

잠자리가 조금 따뜻해지고 빗소리도 들리니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다.

그런 상태가 되어도 잠에 바로 들기란 쉽지 않다.

졸려서 스르륵 잠이 들 때까지는 휴대폰을 쳐다보거나 책을 읽는다.

잠에 들 때까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마침내는 불을 다 켜고 자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워낙 잡생각이 많은 탓에 잠깐이라도 빈틈을 주면 쉴 새 없이 고민과 걱정이 찾아온다.

잠시의 틈도 생길 수 없게, 그냥 지쳐 곯아떨어질 수 있게 끊임없이 의식을 다른 데다 고정한다.

책을 읽으면 잠에 쉽게 들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 방법이 먹히지 않는다.

책에 눈을 고정해도 정신이 다른 데로 나가 있는 경우에는 잠이 오지 않아서 결국 작은 액정 속으로 눈을 돌려야만 한다.

어떤 날은 10시 이전에 잠자리에 들어도 새벽 4시가 될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마침내 스르륵 잠이 오면 스탠드 불을 가장 낮은 단계로 낮춘다.

나는 소리가 없는 상태에서도 잠을 잘 수 없지만, 빛이 없는 상태에서도 잠을 잘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아빠의 TV 소리와 빛을 벗 삼아 잠들어서일까? 글쎄, 모르겠다.

막상 스탠드 쪽으로 얼굴을 향하면 불빛 때문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불을 끌 수가 없다.

스탠드와 등을 돌리고 자는 이유는 불빛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스탠드 반대편을 보고 자면 방문 밖으로 작은 부엌과 현관문이 보이기 때문이다.

현관문과 등을 지고 자면 작은 소리만 들어도 꼭 누가 들어온 것처럼 느껴진다.

일종의 경계랄까, 그러니까 결국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혼자만의 불침번을 서고 있는 것이다.

무슨 소리가 나면 바로 눈을 떠서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경계한다.

그렇게 한참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자면 소리가 아득히 멀어진다.

그제야 잠에 들지만 그래도 무서워서 잠에 다시 들기 어려운 밤에는 온 방에 불을 다 켜고 자야만 한다.


잠에 들기까지도 고되지만, 더 최악은 잠에 들고 나서이다.

매일을 꿈에 시달린다.

뉴스에서 나오는 범죄자가 꿈에 나오기도 하고, 매일을 쫓기고 도망 다니고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소중히 여기는 누군가가 영문도 모른 채 나쁜 일에 휘말리기도 하는 꿈을 꿀 때면, 꿈속의 울부짖음이 현실까지 이어져 내 우는 소리에 깨기도 한다.

1시간당 한 번씩은 꼭 잠에서 깬다.

그래서인지 잠을 자고 나서도 피로하고 기분이 가라앉는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올 것만 같아서 무섭다고.

밤에 들리는 소리가 가끔은 문 여는 소리 같고, 또 가끔은 누군가 들어와서 나를 해할 것만 같다고.

왜 그럴까?

돌아오는 답변은 그게 전부다.

사실 나도 내게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그것 하나뿐이다.

왜 그럴까?


그러다 이 노래의 가사에 집중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가수인 데다 알고 있는 노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전에는 가사에 집중하지 못했었는데,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한 게, 내 처지가 비슷해지니 이제야 들린다.

가사가 너무도 공감이 되고 왜인지 모를 위안이 된다.

사람은 원래 같은 처지에 처해있는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얻곤 하는 족속이니까.

'paranoid', 한국말로는 '피해망상', 혹은 '편집증'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졌다.

한 언어의 딱딱한 사전적 의미 따위가 내 심리를 꿰뚫어 본다니, 묘한 기분이다.


잠에 제대로 들 수 없는 게 카페인 때문인 것도 같아 어제부터 커피를 끊었다.

이제 한 일주일 간은 두통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

여러 차례 카페인을 끊어봤지만, 초반에 찾아오는 두통은 견딜 수 없이 힘들고 거슬린다.

두통약을 상 위에 아예 꺼내 두었다, 언제든지 바로 먹을 수 있도록.

그래도 간밤에는 잠을 꽤 잘 잤다, 꿈도 한번 꾸지 않고.

중간에 3-4번 깨는 것은 별 수 없었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개운 함이다.


4월의 첫날, 만우절이다.

봄을 가장 사랑하는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달이지만, 아직 나는 꽃을 보지 못했고 꽃은 벌써 만개해서 곧 질 것이다.

왜인지 모르게 서글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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