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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yric Nov 25. 2019

할머니의 옥수수밥


일요일 1시, 친구를 만나러 밖에 나왔다.

11월의 끝자락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뜻한 봄 날씨라서 가벼운 차림으로 나왔는데, 남들은 죄다 패딩이다.

친구가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마라탕 집에서 마라가 안 들어간 마라탕을 먹고, 내가 가고 싶어 하던 카페에 가서 초겨울이지만 섬머 라테(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스쿱을 얹어 먹는 카페라테)를 먹었다.

우울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근황도 묻고 내 얘기도 했건만, 말에서 풍겨 나오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숨겨지지 않는지 들켜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나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서로의 근황도 따라잡았고, 늘 그렇듯 가기 전에는 몸 상태가 영 아니어서 조금 귀찮긴 했지만 결과는 아주 좋았다.


친구를 보내고 집에서 초저녁 잠도 잠깐 누리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고 씻고 앉으니 10시다.

4시에 다른 친구를 만나 먹은 피자를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먹지를 않아서 뭐든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편의점에 갔다.

작은 빵 6조각 들이 하나, 계란 4개, 수프 3개입, 믹스베리 우유 하나.

꽤 단출하게 샀다고 생각했는데, 9,500원이란다.

친구랑 통화하다가 욕을 할 뻔했지.

왜인지 모르게 다른 데에선 그 돈이 큰 액수인지 감도 안 잡히는데, 편의점에서 그런 액수가 나오면 미치도록 아깝다.


구시렁대며 비가 내린 뒤의 밤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뒤 집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조리를 시작한다.

달군 웍에 스팸 몇 조각 올려두고 기름을 약간 두른 뒤, 계란 하나와 빵 두 개를 올렸다.

스팸은 골고루 뒤집어주고 계란에는 허브솔트를 뿌렸다.

접시에 옮겨 담은 뒤 주전자에 물을 넣어 끓였다.

컵에 수프를 담은 뒤, 끓은 물을 부어 잘 저어줬다.

친구가 코타키나발루에서 사 온 카야잼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땅콩잼에 초콜릿이 섞인 잼도 나란히 두지만, 카야잼 맛을 한 번 보면 그 잼에는 절대 손이 안 간다.

스팸, 계란, 빵 2개에 카야잼 발라서, 수프도 조금, 믹스베리 우유까지 먹으며 TV를 봤다.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 2라고, 백종원 아저씨가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음식에는 원체 관심이 없어 평소에는 잘 보지도 않지만, 하노이 여행 전 우연처럼 하노이 편을 방영해주기에 꼭 보라는 아빠의 말을 들은 뒤로는 간혹 보곤 한다.

오늘은 연변 편을 방영해주었는데, 다른 건 다 몰라도 눈길을 확 사로잡은 음식이 하나 있었다.

옥수수밥, 옥수수밥이었다.

별건 아니고 흰쌀밥에 옥수수가 있는 밥의 일종이다.

그런데 그걸 보다가 "우리 할머니도 옥수수밥 해줬었는데." 하고 혼잣말을 해버렸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우리 집에 와서 나랑 오빠를 봐주시던 할머니가 자주 해주던 요리가 몇 가지 있었다.

밥에 넣어서 볶기만 하면 되는 보크 라이스, 참치와 김치를 넣어서 끓인 참치김치찌개, 내가 제일 좋아하던 할머니의 된장찌개와 청국장, 그리고 이 옥수수밥.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샛노란 옥수수가 들어간 밥은 아니었지만, 내겐 정말 맛있었다.

그냥 밥만 먹어도 옥수수가 톡톡 씹혀서 더 맛있고 재밌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확실히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인 것 같다.

내 미래에는 새로운 사람의 형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나 또한 새로운 존재를 희망하지 않는다.

내 인생이나 일상에 새로운 타인의 개입은 그다지 달갑지 않고 상상만으로도 피로하다.

당연히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고,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미국인 친구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뭐가 되고 싶은지 모르겠다니까 깜짝 놀랐더랬지.

그냥 이대로 살다가 사라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현실에 충실하고 그보다도 더 과거에 얽매여 있을 따름이다.

나 혼자 산다에 나오는 기안 84처럼 그냥 태어나서 사는 사람이 또 있다면 그게 나인 것 같다고 장난처럼 말하곤 하니까.

미래와 야망,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보니까 다른 누군가는 섭섭해할 만한 일에는 크게 상처를 받지도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리는데 도가 텄으니.

그런데 거의 유일하게 감정이 동요하는 대상은 바로 할머니다.

사실 감정이 동요하는지는 모르겠고, 그냥 제일 하고 싶은 얘기가 많고 생각이 많이 나는 사람은 할머니다.


이상하지, 할머니 살아생전에 우리가 그토록 친했던가? 그래, 친하긴 했었지, 내 마지막 기억 속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하며 나를 자랑하던 할머니가 마지막이니까. 아니야, 우리 시장에도 같이 놀러 가기도 했잖아, 같이 김밥을 먹기도 했고, 그런데 할머니는 나보다 오빠를 더 예뻐했지,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다들 그랬듯 딸보단 아들을 사랑했지, 나는 그래도 그런 할머니를 사랑했어, 할머니랑 같이 촌스러운 분홍색 두꺼운 요를 2층 거실에다 깔고 함께 자는 그 시간이 좋았고, 자기 전 함께 고스톱을 치고 고스톱으로 운을 떼보고 계산 놀이를 배우던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어. 아주 어릴 때 어떤 날은 할머니가 너무 미워서 문 뒤에 숨어 그때 내가 아는 가장 못된 말을 할머니에게 했었지, 바보,라고. 그 날 할머니가 상처를 많이 받았을까? 앞집 슈퍼에서 거북이라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할머니 머리에 다 쏟아버렸을 때 화를 많이 내던 할머니 생각이 나네, 참 무서웠는데, 잊고 싶어도 난 그때 기억이 참 생생해. 가끔 꿈에는 그렇게 화가 난 할머니가 나오기도 하는데. 할머니가 해주던 보크 라이스는 맛이 있었나? 공장에서 만든 거라서 그냥 그랬던 것 같은데, 참치김치찌개는 정말 맛있었어, 거기 들어간 참치만 골라 먹어서 혼이 나기도 했지만, 할머니 된장찌개랑 청국장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때문에 내 입맛이 애늙은이라는 소리도 듣지만, 나는 그런 할머니를 참 사랑했었던 것 같아. 할머니랑 같이 난생처음 석류를 먹다가 속옷에 다 튀어버려서 얼룩이 지지도 않고 난감했었는데. 그런데 할머니 돌아가실 때 내가 슬펐었나? 할머니 아플 때 내가 슬퍼했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 사이코 아니야? 사실 그런데 지금도 그때도 할머니가 없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그래서 눈물이 안 났던 것 같은데, 임종 때 할머니에게 마지막 말을 하라는 가족들 말에 아무 말 못 한 건 내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머니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어. 할머니는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냥 없는 척하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괘씸해서 잠깐 없어진 척하는 게 아닐까? 나 아직도 할머니가 막 보고 싶지는 않은데, 괜찮은 건가? 할머니가 어디 있을까? 언제든 내가 보고 싶을 때 가면 볼 수 있는 건가?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을까? 어땠을까? 늘 용돈을 오빠는 첫째라는 이유로 더 많이 줬지, 그래도 난 오빠가 나이가 더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할머니는 늘 오빠가 좋아하는 견과류는 꼭 기억해두었다가 손이 다 까지도록 할아버지랑 같이 호박씨를 까고 밤을 까고 잣을 까고 했었는데, 나는 그래도 그런 할머니를 좋아했어. 할머니는 들었을까? 내가 힘들어서 죽어버리고 싶을 때, 엉엉 울면서 매번 할머니를 불렀다는 걸? 할머니 할머니 나 좀 데려가 줘, 했다는 걸, 할머니는 알까? 아니면 모를까? 알았으면 데려가 줬을까? 아니면 날 구원해줬을까? 내가 멀쩡히 고통받으며 살고 있으니 못 들은 걸까? 아니면 나를 도와주고 있는 걸까? 아니야, 잘 모르겠어. 할머니는 세상에 있는 동안에 충분히 고생했으니까, 나는 할머니가 더 고통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할머니가 지금은 행복해야 할 텐데, 지금은 웃고 있어야 할 텐데. 내가 처음으로 서운함을 표출했을 때 미안해하던 할머니 얼굴이 잊히지를 않아. 우리 할머니는 나를 사랑했던 게 분명해.


비가 오니까, 또 누가 별이 되어 하늘로 사라졌으니까, 몸이 아프니까, 내일 일하니까, 일하기 싫으니까, 우울하니까, 미래가 어두우니까, TV에 옥수수밥이 나왔으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그런가 봐, 할머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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