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한데, 전 100살까지 살 예정입니다만...
지금으로부터 9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일회용품을 잘 분리해서 버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 믿음을 배반하기 위해 새들의 목에 생수병 뚜껑이 걸려있는 사진이나, 새의 배 안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한 모습들이 쏟아져나왔다. 사람들은 꽤나 분노하고 경각심을 가진 듯 보였으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편리하고 편리한 그런 생활 속으로.
환경주의자들은 말한다. 이제 북극곰이 살 수 없다고. 이렇게 새들이 죽어나고 있다고. 이런 식의 공감은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이다. 자신의 일상이 너무도 긴박한 사람들의 삶에 이런 경고는 먹혀들어갈 수가 없다.
“내 삶이 긴박한데 북극곰이 왜?”같은 의미없는 대답만 되풀이된다.
그러나 일상적인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환경주의자들은 그런 식으로 환경오염에 대해 경고한다. 나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인류는 이타심과 이기심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특히 전 세계를 아우르는 시장경제체제의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을 잡아 거룩한 발전을 이뤄냈다. 삶의 기반이 이미 이기심으로 정착된 상황에서 이타심을 요하는 것은 약간 뭐랄까? 어딘가 알겠으나 나는 모르겠다고 무시하기 쉬운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차라리 인류에 직면한 문제임을 강조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북극곰이 죽어도 내일의 인류는 출근을 하고, 가정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 북극곰이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기 때문에 일을 해야만 한다. 시장 논리에 의해 결정된 우리의 삶은 안타깝게도 공감으로 반박될 수 없다.
다음 인류를 생각하라는 말도 이제 과분하다. ‘딩크족’이라는 개념이 붙자마자 사람들은 이 삶의 방식을 택했다. 굳이 아이가 있어야 하나요? 이들에게 이제 애틋한 다음세대는 없다. 또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나는 무척이나 겁이 많고 이기적이며 한편으론 좋은 사람이고 싶다. 이렇게 이해충돌하는 가치 속에서 내가 ‘환경’주의자가 된 이유는 단 하나다. 100살까지 살고 싶다. 멋진 할머니가 되어서 노년의 삶을 맛보고 싶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의 풍경을 그때도 볼 수 있길 바란다.
미래 환경이 파괴되면 가장 먼저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희생자가 된다. 현재 소득으로 볼 때, 아마 난 그렇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만 같다. 그치만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는 100세에도 이렇게 살아가고 싶다. 나는 할머니가 되어도 따뜻한 물로 박박 머리를 감고 싶다. 지금의 긴 머리를 유지하고 싶다. 매일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싶으며 얼음을 와그작와그작 씹고 싶다. 이 모든 삶이 유지되려면 적어도 최소한 지금의 지구 수자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가 아닌 사회적 약자로 분류될 나의 노년 생활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플라스틱!
플라스틱은 가벼워서 어디론가 가지고 다니기에 좋다. 그리고 튼튼하다. 제대로 배출되지 않은 플라스틱은 해류를 타고 둥둥 이미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바닷물 속에서 플라스틱이 분해된다. 이름하여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바다의 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플랑크톤을 먹는 고기들, 해산물들은 미세플라스틱도 함께 섭취한다. 젠쟝!
이게 왜 문제냐고?
100세에도 전복 내장을 터트린 전복죽을 먹고 싶으니까!
특히나 갑각류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 모든 세상이 불안하다. 생선은 내장을 제거하고 먹지만 갑각류는 내장을 전부 다 먹는다. 그래서 미세플라스틱이 더 문제가 된다고 한다. 내 조개들, 가리비를 먹을 수 없는 삶에서 기쁨은 조금 사라지지 않을까? 슬프다. 이 모든 현실이. 그럼에도 삶은 꿋꿋이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이를테면 지금보다 더 나은 방식으로! 조금더 환경친화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