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슬 Oct 22. 2023

죽긴 왜 죽어 세상에 이렇게나 재미진 게 많은데

덕후는 죽지 않는다. 장르를 옮길 뿐

나는 종종 이십대 후반의 내가 너무도 죽고싶었다는 사실을 까먹는다.

“진짜로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요?”

네 안하더군요. 저도 매일매일 그 생각으로 살았는데 말이에요.


재밌는 책을 읽을 때, 영화관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아니 콘서트장에서 익룡이 되었을 때(아 이때 가장 행복합니다), 질 것 같았던 경기가 이겼을 때, 축구 경기가 끝날 무렵 추가시간이 흐르는 동안 흐르는 도파민, 그리고 불리는 휘슬에서 오는 감격!


뭐 이런 행복만 있겠는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보내는 시간, 같이 먹는 맛있는 식사, 시즌 음료를 먹고 맛 평가하기, 신제품 나오면 먹어보고 존맛탱 감별사하기 등등 세상에는 재밌는 일이 이렇게나 많다.


삶엔 재밌는 일이 많다지만, 그게 평생 재밌지 않아서 슬프다. 나의 경우엔 한 평생 충성을 받치기 위해 밤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구단에서 선수를 연속적으로 거지같이 사와서 마음이 식었다. 마음이 식던 와중 그 구단의 교주님이...에펠탑을 가슴에 박는 순간. 아 저는 이제 그만 일어나겠습니다. 이제 난 뭘 보며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물론 콘서트도 사랑하지만, 콘서트는 연례행사이지 매주 만족감을 주는 취미활동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은 아이돌이 아니시고, 컨텐츠 부자가 아닙니다. 떡밥 따위 없어요. 그의 신곡이 나오면 스트리밍 왜 돌립니까? 전국민이 돌리는 뎁쇼? 물론, 이런 내 가수의 성향덕에 나는 사랑과 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았다.  문제는  내가 사랑을 아이돌로 배운 덕후였던 데에 있다.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려성으로서 아,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다시 돌판을 기웃거리기엔, 요즘 친구들 정말 어리고 예쁘구나. 어쩐지 제가 좋아하라고 만든 그룹들이 아닌 것 같아서요. 아 저는 이만 발을 빼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바뀌었다. 누군가의 아름다운 청춘을 응원하고 살아온 반평생, 이제는 그게 그렇게나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네, 그렇습니다. 마음이 이렇게나 쉬워요. 그래도 무언가를 품고 싶은뎁쇼? 나란 인간 전생에 조류였음이 분명하다. 뻐꾸기는 아니었겠지. 알을 품듯 무언가를 품기 위해 기웃기웃 거리던 내게 새로운 알이 생겼다.


독서와 영화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내게 새로운 유잼이 나타났다. 아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는 전설의 야구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파민 중독자에게 딱 맞는 주6회 경기, 넘치는 컨텐츠, 오 이거 맛집이군요. 10개의 구단 중에서 어디를 응원할 것인가. 아 너무 선택지가 많군요. 당췌 뭘 선택해야 할지. 유니폼이 못생긴 구단의 팬으로 살아온지 어연 8년. 나는 매해 다음시즌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다음 시즌엔 나이키(근데, 님들 옷은 예쁘게 잘 만들잖아요?)가 각성해서 예쁜 유니폼을 만들어 주시길.. 아 이 딱 붙는 핏은 어쩔. 아 저는 루즈핏을 사랑하는 여성인뎁쇼? 이런 식으로 한 해, 한해를 넘기다보니 볼록코어가 유행해도 내 옷장엔 단 한장의 유니폼도 없었다.


그래, 어짜피 이렇게 된 이상. 직관도 가야하고 유니폼이 괜춘한 구단으로 정한다. 유니폼은 대강 거기서 거기고 그걸 내가 입어야 하니까. 그래 나한테 잘 어울릴 유니폼을 고르기로 했다. 아, 네 저 선수 아닌데요? 근데 유니폼을 제가 입을 건 맞으니까. 십만원 짜리 내돈내산 착붙템으로 고르는 거 그거 나쁘지 않잖아요? 쿠울톤인 내게 어울리는 색으로. 그래 이렇게 된 이상 파란색을 메인으로 쓰는 구단으로 간다.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쨍한 파란색의 삼성라이온즈의 유니폼과 엔씨다이노스의 귀여운 단디와 쌔리사이에서 엄청난 내적 갈등이 일어났다. 아 이거 너무 귀여운거 아니냐고. 아 정말 돌아버리겠군여.


굿즈가 집으로 배송되고서야 알았다. 아...야구를 잘 하는 구단을 간택했어야 하는 구나. 이미 어쩌겠는가 나의 방엔 푸른색 템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을.. 잘 하겠지. 뭐 하겠지. 해내겠지.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영원히 재밌는 것도 절대로 없다. 당장 내년 시즌이 개막하면 내가 야구를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하지 않으면 이게 얼마나 재밌는지도 모르니까. 다만 재밌는 새로운 것들이 마구마구 생겨나고 있으니 죽지 말고 살아봐요.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할게요. 제발요 잘해주세요. 삼성라이온즈 제발요.

이전 07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