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노무 노트 #3
몇년 전 일이다. 지금도 존경하고 있는 모 파트너 변호사님과 어느 외국계 기업의 직장 내 괴롭힘 사내 조사를 대행하기 위해 강남역 인근으로 출장을 갔었다.
그 기업은 꽤나 규제가 엄격한 산업 분야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었고, 직장 내 괴롭힘의 가해자로 지목된 피신고인은 해당 규제에 대한 경험과 이해를 바탕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어느 팀의 팀장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력한 차기 임원 후보로 평가받는 핵심인재. 제반 사정에 따라 구체적인 조사 절차는 달라질 수 있지만, 그래도 신고인과 피신고인에 대한 인터뷰는 반드시 실시하게 되며, 이 외국계 기업의 경우에도 신고인과 다른 팀원들, 피신고인에 대한 인터뷰를 순차적으로 진행하였다.
당시 3년차 어쏘 변호사였던 내가 미리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일차적으로 요청하고 전달받은 내용을 확인 및 정리하여 질의지 초안을 준비했으며(따로 적을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종적으로 매우 두꺼운 결과보고서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매우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이를 기초로 인터뷰는 파트너 변호사님이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유독 기억에 남은 이유는, 그 기업의 로비를 나서면서 파트너 변호사님이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대기업 공채로 입사하여 인사팀 생활을 3년쯤 해보고 비로소 변호사가 된 나는, 그래도 어느 사람이 가해자인지 피해자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조금은 있었다. 내가 인터뷰에서 본 그 팀장은 지나치게 열정이 넘쳐서 팀원들을 들들 볶고 못살게 하며 심지어는 인격적인 모독까지 주는 힘든 상사였고, 이 사람은 무조건 가해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존경해 마지 않고 항상 정확한 판단을 내리며 인사노무 분야의 최고 전문가 가운데 한명이라고 평가받는 파트너 변호사님이 전혀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변호사님은, 첫 입을 떼자마자 해당 팀장에 대해 아주 영리하고 적극적이며 자기가 맡게 된 임무를 완벽하게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최고의 인재라고 평하면서, 그러한 인재를 보유하고 있는 그 기업의 사장은 얼마나 좋을까에 대해서 오래 이야기하셨다.
성별은 크게 중요한 쟁점은 아니었지만, 피신고인이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진심을 다해 격정적으로 일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불리한 요소들을 극복해낸 스토리에 조금은 감동을 받으셨던 것 같다. 조금 과하게 업무를 처리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결과를 창출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처럼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아가 팀원들의 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발생한 측면이 있었다고 보시는 것 같았다.
나는 변호사님께 혹시 '똑게', '똑부' 같은 용어를 들어보셨냐고 되물었다. 동시에 이 분은 유능한 개인일지는 모르겠지만 팀원들에게는 결코 좋은 팀장은 아니었을 거라고 반박했다. 그 팀의 팀원은 약 20여명 정도였는데, 예정되어 있던 익명 서베이 결과가 나오면 장담컨대 피신고인이 가해자가 맞다는 걸 똑똑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그걸 보시고나서 결정하여도 늦지 않을 거라고 확신에 차 말했다.
서베이 결과 모든 팀원이 피신고인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를 했고 주관식 답변란에는 팀장의 행위로 인해 인해 자신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를 장문으로 절절히 적은 사람이 세명이 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그 피신고인의 여러가지 행위 가운데 몇 가지에 대해서는 직장 내 괴롭힘이 성립한다는 결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이 사건을 나와 함께 한 파트너 변호사님은, 국내 최고의 로펌에서 이직해오신 분으로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후배들이 쓴 서면을 꼼꼼히 검토하여 정확한 피드백을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며(파트너 변호사는 매우 바쁘기 때문에 제대로 지도를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특히 어쏘들을 인간적으로 대해주셨던 분이었다(이러한 분은 더욱 드물다).
그렇지만 최고의 변호사도 일반적인 회사 생활을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 팀장의 가혹한 행위가 팀원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지는 쉽게 체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변호사들, 특히 대형로펌 변호사들은 기본적으로 일에 극도로 몰입해서 성과를 창출하는 것에 경도되어 있고 스스로를 갈아넣어서(?) 주말, 밤낮할 것 없이 일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설혹 인사노무를 전문적으로 다루더라도 사회통념에 부합하는 일하는 방식과 조직문화에 대해서는 조금은 낯설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정말로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동일한 사실관계를 여러가지 시각과 관점에서 거듭 고민해보는게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론과 논리의 정합성에만 치우치다보면 이를 실제 사회에 적용했을 때 불합리한 결과가 있을 수 있고 일견 완벽해보이는 형식 논리도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반례에 의해 깨지게 된다.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접수하거나 그 발생 사실을 인지한 경우에는 곧바로 해당 사실 확인을 위한 객관적 조사를 실시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데, 전문성이나 업무량, 추후 분쟁 시 대응의 용이성 등을 고려하여 로펌 등 외부의 제3자에게 해당 조사 업무를 의뢰하는 경우가 잦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결론을 어느 정도 내려놓고 조사를 진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정말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실관계에만 기반해 결론을 내리려는 경우가 보다 더 많으며, 이러한 경우에는 제반 사실관계를 다각도에서 면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이때 노동법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이 그러하듯, 직장 내 괴롭힘 역시 그 법리는 물론이고 사실관계에 대한 정확한 사회적 평가와 이해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체화된 경험을 토대로 사건을 타 변호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한번 더 분석하고, 마치 내 가족의 사건처럼 시간을 들여 사실관계를 모두 뜯어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