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애틀 닥터오 Nov 17. 2020

망각의 저주 아니 축복

치매, 그 젊은 날의 후회?

나는 잘 잊어버린다.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겠다. 망각이라는 것이.

20대에는 참 잘도 기억해서 내 기억력은 천재 정도는 되겠다 생각했다. 남자 친구는 내 암기력이 뛰어나다며 좋아했다. 대체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결혼식 주례를 맡으신 목사님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좋은 이유를 말하라고 하니, 그 대답이 ‘기억력이 대단해서 좋다’고 말했다. 웃픈 일이 있었다. 사랑이 기억력 따위에 밀려버리다니.


어느 한 남자가 강하게 느낀 나의 매력적인 기억력이 어느 순간부터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기억력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기억력이 점점 소실되어 갈 때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중에 하나, 치매.

치매는 이제 옆집 이야기가 아니다. 내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이 걸릴 수 있는 너무도 친근한 병이 되어 버렸다. 벌써 우리나라 노인 인구의 13프로 이상이 치매환자라고 한다.* 하지만, 13프로보다 더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일단 내 증조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셔서 돌아가셨고, 지금의 구십 세 넘으신 할머니가 또 치매에 걸리셨다. 두 분이 유전적으로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가까운 가족들 중, 벌써 두 분이나 치매에 걸리셨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가족 중 한 명이 치매 환자가 있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친한 친구의 어머니도 60대에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젊은 나이에도 치매를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치매라는 것은 본인에게 힘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더 고통이 된다. 치매 초기에는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에 마음이 힘들겠지만, 치매 증세가 있는 동안 겪게되는 가까운 가족들의 고단함은 직접 겪지 않으면 알 수없다.

흥미로운 것은 내 증조할머니는 젊으셨을 때, 성격이 괴팍하셨다. 나에게 괴팍하시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말로는 할머니의 시집살이를 호되게 하셨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성격이 불같아서 화도 잘 내셨다고 한다. 하지만, 치매에 걸리고 나서는 착한 양이 되셨다. 내 기억으로도 치매에 걸린 증조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시지는 못했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항상 나에게,

“누구신가?”
“할머니, 증손녀!”
“그래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날 보려고 와줘서 고마워요.”


이러시며 아이 같은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셨다. 기억은 못하셔도 친절하게 말하시는 증조할머니가 귀여웠다.

사람을  알아보시는 것을 빼고는 달리 흠잡을 데가 없으셨다. 증조할머니는 젊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셔서 주변 사람들이  편해졌다고 한다. 엄마도 종종, “증조할머니 치매 덕에 할머니가  편해지셨어.”라고 말했다. 물론 다른 불편함도 있으셨겠지만, 심리적으로는 조금  편안해지셨다니 다행이었다.

증조할머니의 며느리인  할머니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  년이 지나 치매가 시작되셨다. 젊을   예쁜 얼굴을 하셨던 할머니는 항상 풀이 죽은 얼굴로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눈치를 달고 사셨다. 어린 나도 한눈에 알아볼  있었다. 친가의 대세는 목소리 크신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였음을. 할머니는 그저 그분들 옆에 하인처럼  한마디 못하시고 당신의 의견을 전혀 내놓지 못하셨다.

이랬던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욕을 시작하셨다.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하고 말 수가 적으셨던 분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나 보고도 욕을 잘도 하신다. TV에 나오는 문재인 대통령을 보고도 욕을 하고, 재미없는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도 욕을 하신다. 신기한 것은 욕을 하는 대상들이 공통점이 있었다. 당신의 욕을 뭐라 맞받아 칠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하신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렸어도, 욕을 할 수 있는 사람과 하면 안 되는 사람이 분간이 가시나 보다. 엄마는 며느리라 욕을 해도 되는 대상인, 엄마가 보약을 갖다 드려도   사약이라며 엄마를 욕하신다. “시어매를 죽일라고 사약을 가져와!?” 라며. 치매를 늦추는 약을 드려도 드시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리신다.

치매 전에는 모두가 할머니를 편하게 대했지만, 지금은 그런 할머니가 불편하다.

할머니는 살면서 욕하고 싶은 상황이 많으셨나 보다. 그게 한이 돼서 치매에 걸리신  아닌지. 치매라는 가면을 쓰고 당신이 하고 싶은 욕이라도 실컷 하려고 하셨을까.  웃으셨고, 소녀 같았던 상냥한 할머니가 거친 욕을 하며 세상을 비관하는 말씀을 하시는 모습을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인생이 후회가 되시나 보다. 하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일을 못하며 지낸 젊은 날의 세월을 욕이라도 하며 남은 생을 사시려고 치매에 걸리셨나 보다. 그렇게라도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 참고

1) 국내 치매 노인 유병률 현황과 위험요인, 조맹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

2) MD Journal, 젊은 사람도 걸릴 수 있는 뇌의 병, 치매, 2002. 12.0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