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질적인 만성통증 환자다. 아프다고 티 내는 걸 제일 싫어한다. 아파도 안 아픈 척 연기하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다. 진통제를 달고 다니며, 통증을 무시한다. 사람들은 내가 통증 때문에 오래 고생했다고 하면 놀란다. 전혀 몰랐다며.
재작년까지 일주일에 5일을 꼬박 일하면서 몸을 혹사하다 목이 안 돌아가는 지경까지 가게 되었다. 20대부터 어깨와 목에 이상 신호가 왔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으니 그냥 그때그때 운동을 하며 풀었다. 요가, 필라테스, PT, 줌바, 걷기, 달리기 등등. 열심히 일하면서 운동을 하니 주변에서 참 대단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저 생존을 위해서였다. 통증을 줄이기 위한.
두통을 동반한 근육통의 시작은 30대 초반부터였다. 개운해야 할 매일 아침이 나에게는 가장 우울한 시간이었다. 아침에 찾아오는 목, 등 통증 때문에 밤에 잠을 청하기가 두려웠다. 그저 직업병이겠거니 생각하고 저주받은 내 몸뚱이를 겨우 다독이며 일을 했다.
치과의사라는 일이 사람의 몸을 이렇게 망가뜨리나 보다, 하고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들었다느니, 특히 여자 후배들에게는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직업을 바꾸라느니, 별말을 다 하며 내 직업에 대해 막말을 하고 다녔다.
목이 안 돌아가게 된 시점에서 몸의 상태를 알아보니, 목의 세 군데에서 디스크 소견이 있었고, 등 척추가 어긋나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뼈에 붙은 모든 근육이 몸의 앞, 뒤로 얼음이 꽁꽁 얼어버린 것처럼 근육 빙하기에 들어간 것이었다.
치료를 위해 이곳저곳을 다녔다. 정형외과, 한의원, 물리치료 등등. 통증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방도가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을 시점에 어느한의사를 찾아갔다. 그분이 치료 마사지도 함께 권하며 마사지 하시는 분을 소개했다. 소개받은 그분이 나의 치료 정착지가 될지 그때는 몰랐다.
그분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통증 위주의 치료 마시지를 하시는 중국인 아주머니셨다. 중국어, 한국어, 영어가 원활하셨다. 한국에서 6년을 중국어 강사로 일한 경력이 있고, 외할머니가 부산 출신이시고, 이모가 아직도 한국에 살아계셔 한국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이셨다.
나의 상태를 몸 상태를 검진해 보시더니, 몸에서 교통사고의 흔적이 보인다고 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참 희한하다, 교통사고가 난 적이 없는데 왜 교통사고의 흔적이 내 몸에 있을까, 생각했다. 며칠 후, 수많은 세월 동안 잠자고 있던 기억이 눈을 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빠가 운전을 하고 교회를 가던 길, 작은할아버지에게서 공짜로 받은 중고차, 대우 프린스가 얼음길에 핑그르르 돌아가더니 왼쪽 옆으로 내놓은 시멘트 하수 고랑에 깊게 처박혔다가 튕겨져 나왔다. 차의 위아래가 뒤바뀌어 나는 조수석 의자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다행히 누구 하나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때 맞춰 지나가던 마음씨 좋은 트럭 주인이 우리를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해주셨다. 그때의 검사로는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니 오랫동안 그 교통사고가 나를 지금까지 따라다닐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치과의사들은 주로 한쪽을 많이 쓰기 때문에 대부분 오른쪽이 뭉쳐있는 것이 발견되지만, 나의 경우는 달랐다. 오른손잡이인 나는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 더 굳어 있었고, 통증도 주로 왼쪽이 많았다. 사고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차가 왼쪽으로 충격을 받았으니 내 왼쪽의 통증이 정확히 설명이 되었다. 사고 이후, 왼쪽에서 시작하여 내 모든 유연 조직이 서서히 뭉쳐 통증과 함께 제 기능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케케묵은 통증의 원인을 알아내니 속이 다 시원해졌다. 통증도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죄 없는 직업을 오랫동안 증오하며 살아온 게 민망했다.
일 년 동안 꾸준히 치료 마사지를 다녔다. 두통이 많이 사라졌고,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오던 몸살도 거의 없어졌다. 아침에 일어날 때 완벽하게 개운하지는 않지만, 통증으로 하루를 비관하며 시작하지는 않는다. 크나큰 변화다.
한 동안, 왜 일찍 알아내지 못했을까? 그때 왜 나에게 사고가 난 것일까? 답도 없는 질문이 나를 괴롭혔다. 통증으로 얼룩진 내 젊은 날들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래 봤자 괴로움만 더했다.
이제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마라토너들의 인터뷰 기사에서 Pain is inevitable, suffering is optional이라는 그들의 만트라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아픔은 피할 수는 없지만, 괴로움을 느끼는 것은 내 선택이라고.
통증을 즐겁게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통증과 소통하며 원인을 찾고, 이제는 잘 떠나보내기 위한 일들을 하는 것이 괴로움을 피하는 길일까. 그동안 자기를 알아봐 주지 못했던 통증을 알아주고 인정해 주니 그간의 설움이 풀렸나 보다. 이제 나에게서 떠날 채비를 한다. 내 몸의 빙하기도 풀리고, 내년엔 내 몸에도 꽃이 피는 봄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