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애틀 닥터오 Jul 28. 2021

큰 며느리는 억울하다

할머니 요양원 가시던 날

어젯밤이었다. 생각할 일이 자정이 넘어 잠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새벽 네시가 되어 깨어버렸다. 잠을 청했지만, 다시 오질 않았다.


새벽 네시면 한국은 저녁 여덟 시. 부모님이 전화받기 딱 좋은 시간이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다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가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잠이 깨서 전화해 봤어. 별일 없어?”

“할머니 내일 요양원 가신다. 할머니 짐 정리한다고 엄마가 바빠.”


할머니는 아흔을 훌쩍 넘기셨고, 치매도 치매지만, 다리에 힘이 없으셔서 거동이 불편하게 되셨다. 이제는 다리로 걷지를 못하셔서 정신이 돌아오실 때는 방에서 꼼짝을  하시고, 제정신이 아닐 때는 팔과 엉덩이를 이용해 동네 흙바닥을 마구 휘젓고 다니셔서 위험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 저녁이 되면 엄마는 잠투정을 하는 아이를 달래듯 할머니를 달래느라 곤혹을 치러야했다. 어제 저녁은 오랜 고심 끝에 할머니를 요양 병원으로 모시기로 하고 할머니와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었다.


아빠와 통화를 하는 도중, 엄마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엄마는 코를 훌쩍거렸다. 울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울어?”

“할머니 내일 요양 병원 가는데 마음이 안 좋아서...”


마음이  좋을게 무에랴. 할머니가 거동하며 밥을  드셨던  전에도 부모님은  달에 두세 번씩 왕복 서너 시간 거리를 오가며 할머니가 좋아하는 먹거리와 옷가지를 챙기셨다. 그리고 4전, 할머니가  이상 홀로 지내   없다는 결정을 내리고 부모님 집으로 모셨다. 그리고 엄마는 노인 요양을 위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작년에는 요양사 자격증을 따셨다. 할머니 자식이 일곱이지만, 할머니를 신경 쓰는 사람은  며느리인 우리 엄마뿐이었다.


어릴 적 나에게 친절했던 삼촌과 고모들이 왜 그리도 자기 엄마를 돌보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나름 사정이 있겠지.


몇 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일평생 당신의 일을 거들고 챙겨준 엄마와 아빠에게 당신이 살던 집과 논을 넘기셨다. 그게 맞는 것이라며. 하지만 나는 뒷일이 뻔히 그려졌다.


결국 아빠 형제자매들은 얼마 되지 않는 그 유산을 아빠에게서 빼앗기 위해 법정 소송을 걸어왔다. 큰 숙부와 작은 숙부가 아파트를 살 때 할아버지는 이미  큰돈을 도와주신 걸로 안다. 그들은 그것도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었다.


소송은 3년이나 걸려 끝이 났다. 판사의 판결은  누구에게도 유산이 돌아가게 하지 않았고, n분의 1 하던지,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던지,  가지 옵션이 전부였다. n분의 1  경우, 할아버지의 땀과 노력이 서려있는 땅과 집은 갈기갈기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뻔했다. 아버지는 다시 할아버지의 이름으로 원상복구를 하는 것이 낫겠다고 했다. 이미 그전부터  고모와  숙모가 할아버지의 집터가 풍수에 제격이라는 ,  값과 터에 관하여 이미 전문가에게 의뢰를  상태였는지 자기네들이 부동산 업자인디 복부인인지   없는 태도를 취했었다. 아버지는 그걸 생각하면서 몸서리를 쳤었다.  어이없는 것은 소송이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서 큰고모는 할머니의 모든 패물을 훔쳐내고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다. 안하무인이었다.


그들은 부모님 돌보는 일은 큰 아들, 큰 며느리 몫이고 유산 상속의 권리는 모든 자식들에게 있다며, 아빠를 뺀 나머지 육 남매는 손해가 되는 일에는 나 몰라라 하고 이득이 되는 일에는  만사 제쳐두고 소송에 앞장을 섰었다.


평생 할아버지의 일과 땅을  알고 있고, 앞으로도 그것을 관리할  있는 아빠가 상속받는 것이 자연스러웠지만, 자기네들도 지분이 있다며 개떼처럼 달려드는 그들을 막을  없었다. 나는 아빠에게 손을 떼라고 했지만, 어린 시절과 부모님과의 추억이 있는  동네와 고향집을 포기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아니 아빠는 자기의 젊은 날의 고생과 부모 부양에 대해 자기 형제자매들에게 부인당하는 대목에서 분노를 참지 못하셨다.


아빠 형제들은 일손이 많이 필요한 바쁜 농번기에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았다. 명절에는 모든 음식이  준비되었을 법한 뒤늦은 시간에 등장해 제일 먼저 귀가하기 바빴다. 길이 막힌다며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트렁크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땀과 엄마와 아빠의 손길이 켜켜이 묻어있는 먹거리들그득했다.


코딱지 만한 유산을 두고 싸움이 났다고 하니 예전 그런 일들이 하나씩 머릿속에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창피했다.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소문만 듣는다면 재벌집 유산상속 싸움이 났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재벌가의 발톱의 , 아니 발등의 각질 꺼스랭이도  되는 유산이라 거론하기도 민망스럽다.


부모님은 소송에 필요한 돈도 없으셨다. 내가 함께 적극적으로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덜 억울할 수 있도록 법정 싸움에 필요한 자금을 대 드렸다. 원하는 판결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도와드린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 간에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들의 의미 없는 법정 공방을 통해 어처구니없는 고집이 사그라들기를 바랐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들이 깨닫기를 바랐다. 그들이 잘 배웠는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다. 어떤 성과는 있었겠지.


그동안 엄마는 좋은 마음으로 시동생들의 사정을 이해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정을 떼 버린 것 같았다. 얼마 전 할머니가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피 터지게 싸움을 걸던 그들이 병원으로  들이닥치며 엄마에게 쌍욕을 퍼부었다. 엄마는 말문이 막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병원 밖으로 내쫓겼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가슴이 불붙듯이 뜨거워졌다.


다행히 시동생들  반은 엄마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날의 사건은 쌍욕을 하며 엄마를 밀쳐대던 시동생들 때문에 엄마의 마음은 시댁에 두었던 실낱같던 기대마저 활활   없어져 버렸다.


할머니는 치매가 심해져 사람을 알아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고, 피부병이 낫지를 않아 결국 병원으로 모시기로 했단다. 전문인들의 손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부모님은 시동생들이 있는 단체 문자 방에 할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실 것이라고 통보를 보냈다. 어차피 그전부터 할머니에게 관심이 없던 그들은 할머니를 진작에 병원으로 모시라고 하긴 했었다. (그들의 마음은 큰며느리를 배려한다거나 할머니의  나은 케어를 위한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반은 자신의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단체 문자 방을 퇴실한  오래였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들이  각별한 관심을 두실 것이지  이제 와서병원비를 다달이 보내야 한다는 의견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고 방을 퇴실한 사람도 있었다.


엄마가 그동안 들인 수고에 대한 인정과 감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이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았던 엄마가 요양원 신세를 진다는 것과 매달 자기 돈이 나간다는 것에 불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은 엄마와의 전화 통화에서 꺼이꺼이 울어댔다. 자기 엄마가 불쌍하다며그들의 울음은  며느리를 지탄하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큰 며느리가 하는 일에 대해 본전을 찾는 일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듯 보였다.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보살피는 일은 아무리 잘해도 그 병세는 더 악화될 뿐이었고, 전문가의 손이 필요해 요양병원으로 모시는 일도 그들의 눈에는 엄마의 잘못으로 비쳤다.  


잠이 오지 않던 새벽, 엄마와  시간을 통화했다. 엄마는 연신 코를 훌쩍 거리며 자신의 억울함을 이야기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 할머니의 인생도 처량했지만, 엄마의 희생이 무참히 밟히는 것을 보고 있자니 무기력감에 마음이 쓰라렸다. 하나님은 아시겠지엄마의 희생을


엄마,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아니라, 환자라서 병원에 시는 거잖아. 이제 할머니는 엄마가 돌볼  있는 수준을 넘어선 환자라고할머니 젊으셨을 때도 자주 아파서 병원 입원 많이 하셨잖아. 지금도 그때랑 다를게 없다고 생각해. 엄마…”


“알았다.”


엄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엄마는 자신이 고생하고 희생해도 더 칭찬해 주거나 더 좋아해 주지 않던 시부모님들을 정성껏 모셨다. 나이 들어 생을 다 해가는 것이 어찌 며느리의 잘못이랴.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그 누구의 말도 무시하고 엄마의 행복을 위해 살면 좋겠다.


엄마한테 더 잘하고 싶을 때 하는 흔한 말을 지껄여 본다.


“엄마, 다음 생애에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내가 엄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줄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