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로 인한 상처
나는 청소년기에 매일 일기를 썼다.
나의 십 대에 제일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가 매일 일기를 쓰는 일이었다. 그날그날의 감정과 머릿속에 남는 인상 깊었던 일들을 쓰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본인도 알 수 없는 호르몬의 널뛰기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잦은 부모님의 전투를 보지 않아도 되지만 외로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던 그때에 내가 의지하게 된 것 중 하나는 일기 쓰기였다.
어떤 계기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 타운젠트의 ‘비밀일기’를 읽고 나서였는지, 친구에게 일기장을 선물로 받고 였는지, 아니면 그 둘 다 였는지...
내 일기장의 단골손님들은 이제는 이름도 가물가물한 짝사랑 오빠들이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 그래서 더 의미가 없다.
금사빠병에 걸려 좋아하는 감정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때는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그 감정이 더 중요했었다. 나의 감성 풍부했던 그 감정들에 사랑에 빠지곤 했었다.
이런 모든 나의 감정들과 이름들, 사춘기의 고뇌와 학교의 부조리, 등등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기숙사 생활이 지겨워질 때쯤, 나는 엄마에게 하숙을 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같은 반 친구가 함께 살자며 여러 번을 꼬셨기에 그 친구 집에서 하숙을 하면 되었다. 그 친구가 나를 정말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 집으로 하숙을 들어갔다. 나의 일기장과 함께…
그 친구는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나를 시기했다. 질투가 나면 함께 공부하고 들어오면 될 일이었지만, 늦게 까지 공부하고 돌아오는 나를 왜 그리도 탐탁지 않게 생각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늦은 시간, 내가 함께 귀가하던 같은 동네 오빠를 짝사랑했었나?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 선배와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 나의 마음과 그 집에서 벌어지는 희한한 일들, 마음에 드는 일과 들지 않는 일들을 모조리 일기장에 기록했다. 그리고 가끔 생각했다. ‘혹시 걔가 내 일기장을 훔쳐보지는 않겠지?’ 의심을 하지 말았어야 했나?
어느 날밤, 자정이 다 되어 돌아온 나는 방바닥에 고개를 푹 숙이고 내 일기장을 보고 있는 그 친구를 마주해야 했다. 의심이 현실이 되었다. 나는 그때, 나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서투른 십 대에 불과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먼저 그 친구는,
“너의 일기장은 쓰레기야… 너를 위해 내가 새로운 일기장을 준비했어.”
그가 내민 일기장은 내가 가지고 있던 일기장 두께의 삼분의 일이었고 그 크기는 내 손바닥만 했다. 나를 엿 먹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입 밖으로 나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아직도 후회가 된다. 숙맥 같은 나였다.
어느 일요일 아침, 하숙집에 전화가 울렸다. 제일 가까이 있던 내가 전화를 받았다.
“수진이니?”
남자 목소리였다.
“네!”
“나 xx 오빠야!”
“…”
xx오빠는 내 일기장에 적힌 사람이었다. 그 오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목소리는 담임선생이었다. 갑자기 순식간에 왜 담임이 내 일기장에만 적혀 있는 비밀의 이름을 알고 있게 되었는지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하숙집에서 일기장 도둑을 맞은 후, 매일 일기장을 가지고 다니게 되었던 그 주, 전교생이 강당에서 채플을 하고 있던 그 시간에 각 반에서 소지품 검사가 있었다. 그때 담임이 내 일기장을 훔쳐본 것이 분명했다.
두 번이나 일기장 도둑질을 당하다니. 잠깐 동안이었지만, 내 일기장을 저주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일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아무리 기억을 거꾸로 돌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그리고 일기장 도둑들과는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다.
사랑의 상처는 또 다른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했나? 그럼 일기의 상처는 또 다른 일기로 치유가 될까?
뒤늦은 나의 기록들이 상한 내 마음을 낫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