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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Jun 17. 2021

사람은 얼마만큼의 스승이 필요한가?

끊임없이 배우는 인생


지난달이었다. 스승의 날이 하루 지난 일요일,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늦게 대학 때 스승님께 전화를 했다.


“아이고, 어떻게 나를 생각해서 이렇게 전화를 줬어!”

“교수님 밖에 생각나는 분이 없네요. 하하!”


그렇게 대답을 하고 보니 다른 스승님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분의 얼굴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내 대답은 사실 참말은 아니었다. 그분들도 내 기억 속 소중한 분들이지만,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그렇게 대답해 놓고 전화드리지 못한 다른 스승님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원까지 몇 명의 스승님이 나를 가르쳤나 생각해보았다. 깡시골에 유치원은 없었으니 유치원은 패스! 초등학교 여섯 분, 중고등학교 네 분(두 분이 2년씩 담임을 하심), 대학 때 지도교수 네 분을 포함하여 모든 전공 필수, 전공 교양, 선택 필수, 교양 선택 등등을 합치면 매 학기 24학점 정도를 들었으니 중복되는 교수님을 감안해도 대략 100명은 되지 않을까?


대학 때 꾸준히 다녔던 SDA 영어회화 학원과 통역 대학원 준비반 선생님들을 포함하면 열네 분의 선생님도 잊을 수 없다.


치과 대학원 전에 다녔던 undergrad에서의 스승님은 또 어떤가? 매 학기 세 과목을 들어 모든 과정을 마치기까지 계산해 보니 17명의 선생님 수가 나왔다.


치대를 다닌 기간 동안의 선생님은 몇 분일까? 4년간의 이론 선생님 수와 실습 선생님을 센다면 80명은 족히 넘는다. 학교 과정에서 지나간 모든 선생님 수만 대략 계산해도 200명이라는 총수가 나온다. 한 사람을 사회에 내보내고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필요했던 스승님이 나에게는 200명이었다는 의미다. 30대 중반에 치대를 졸업했으니 사람이 30년 동안 200명의 스승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스승의 날 모든 선생님들을 다 생각하면 좋겠지만, 가장 많이 생각나는 분들을 추려보니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나를 칭찬과 격려로 더 신나게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셨던 스마일의 선생님들,  다른 한 부류는 아주 엄격하셔서 숨도 제대로 못 쉴 만큼 무서웠거나, 그분들의 수업방식과 시험 출제가 저 세상 것이었기에 혹독한 스파르타를 경험하게 해 주셨던 선생님들… 각자 다른 색깔로 나에게 큰 영향을 주셨던 선생님들을 잊을 수 없지만, 아무래도 혹독했던 스승님들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러다 나의 의식의 흐름은 ‘요즘 나의 스승은 누구인가’였다. 치대를 졸업하고 이제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졸업 후, 첫 몇 년간 축제 같은 나날을 보냈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나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던 사람들과 사건들 때문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들이 내 스승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학교에 가지 않아도 사람은 끊임없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다. 그날의 날씨를 통해서도 배우고,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들, 나를 욕하는 사람들에게도 배운다. 몸이 어디가 아프면 통증 또한 내 스승이 된다. 일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사건 또한 나를 가르치려 든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건 아니건, 삶에 적응을 하건, 아니건 상관이 없다. 어떻게 해서든 나를 괴롭혀 가며 원치 않는 고난을 제공한다.


문제는 내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마주하지 않으면, 더 크고 무섭게 나를 몰아세우고 혹독히 가르친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고통은 인생의 스승”이라고 했다.


격하게 고통의 선생을 맞닥뜨리고 나면, 대체로 그 이후가 편하다. 반대로 고통을 무시하고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그 뒷일은 생각하기도 싫다. 스승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등장하는 인생의 고난과 고통은 참 애꿎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인생의 고난과 고통의 총량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그 총량이 같다면, 차라리 한꺼번에 끌어다 쓰고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작은 고난들을 조금씩 겪으며 죽어갈 것인지 고민이 된다. 사실 그 어느 쪽도 선택하고 싶지 않지만, 선택이 둘 뿐이라면, 크게 한 번의 고난을 겪고 끝내면 좋지 않을까?


힘든 시간들을 지나와 ‘나는 고난을 미리 끌어다 썼나 보다하고, ‘이제  편하겠지.’ 마음을 놓았지만,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난다. ‘ 인생  모양 일까? 하나님은  고통 소리를 듣고 있기는 한가? 신은 불공평하다.’ 라며 불평하며  사람  사람이 가진 고통을 비교한다. 나만 힘들고,  고통이 제일 크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제대로 들여다보면, 나보다 더 잘난 인생도, 못난 인생도 없었다. 세계 인류를 위해 자신이 가진 엄청난 돈을 기부하며 행복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였던 빌 게이츠도 결국 그렇지 않은 모습이 드러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세상 물정 모르며 재잘거리는 네 살짜리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 보이지만, 그들이 앞으로 겪어나가야 할 인생을 생각하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고통 없이 지나가는 인생은 없나 보다. 각자 나름의 고난과 고통으로 비슷한 정서적, 신체적 스승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제일 힘들다는 생각은 확인되지 않은 편파적인 개인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하늘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조금은 사그라든다. 그저 잘 배우고 잘 지나가기를 바라며 신과 교통 할 뿐이다.


인생이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신의 본심은 아니라고 했다. 시험을 당할 때는 각자 감당할 만하며 어디로든 피할 길을 주신다고 했다.


40년 넘게 내 인생을 만들어준 스승이 얼마만큼인지 이제는 셀 수도 없을 지경이다. 이제 좀 배웠다 싶어 넋 놓고 있다가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인생의 스승들은 달갑지도 않다. 앞으로 올 또 다른 40년간의 스승은 대체 얼마만큼일지 생각하며 대체 나는 얼마나 더 배워야 할지 고심하게 된다.

 

배울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굳이 그 많은 스승이 필요할까 싶다. 내가 부족해서 배워야 할 게 많으니 고통도 여러 종류로 다각적으로 온다. 어쩌랴... 내가 배울게 많다는데... 수긍하고 순응하면 덜 괴로우려나…


결국, 몇 천명의 스승에게 배운 들 완벽해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필요한 스승은 무한대 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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