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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May 21. 2021

검지 손가락처럼 일하는 그대들에게

다친 손가락으로 일하지 않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파란 하늘이 가장 높이 떠오르고, 따뜻한 해를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때가 오면 꼭 운동회가 열렸다.

학교 운동장은 들뜬 학생들과 부모님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나와 동생들과 부모님은 학교의 가장 큰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자리를 잡았다. 파란 하늘 밑으로 엄마 손을 닮은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아늑하게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지절거리는 행복한 사람들의 소리가 바람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만 나만 홀로 그들과 다른 세계에 갇혀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는 그날의 행사에 하나도 빠뜨림 없이 참여해야 했다. 반대항 경기를 비롯하여 고학년 단체 게임이었던 부채춤과 소고춤은 물론, 기계체조, 마지막 육상까지 도합 다섯 개 종목에 참여하느라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을 새가 없었다.


다음 종목을 위해 세 번째 옷을 갈아입고 있었을 때쯤, 나는 짜증이 올라오다 못해 억울한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엄마, 나는 운동회 날, 왜 이렇게 바쁜 거야?”

“몰러! 일 많은 게 날 닮았나 부지!”


그렇게 말하는 엄마도 미웠다. 동네에서 일이 손에서 떠나지 않기로 소문이 난 엄마는 자기 운명이 딸에게도 옮겼을 거라 생각했나 보다. 정말 그런 걸까? 엄마를 닮아 책임감 빼면 시체였던 나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다음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도 많은 짐을 어릴 때부터 지고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담임 선생님은 내가 이렇게 많은 종목에 가담하고 있었는지는 알고 있었을까? 고학년 때 잠시 잠깐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조금 더 커졌던 터라 선생님들 눈에 자주 띄었던 게 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당시 시골 학교에서 특활활동들은 눈만 마주치면 시키던 버릇이 선생님 사이에 불문율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나는 그 관행에 희생양이었을지도.


그래서 나는 운동회 날이 싫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은 운동회 날이 되면 좌판으로 벌여놓은 새로운 장난감 보부상들을 구경하랴, 잉어 모양 엿을 따기 위해 무의미한 로또 뽑기로 정신이 팔려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꼭두새벽부터 정성 들여 싼 엄마의 김밥과 간식은 또 다른 행복 거리였지만, 그 어떤 것 하나도 내 것이 없었다. 내 몸은 그저 운동회 행사에 팔린 노예 같았다.


운동회 날 저녁이 되면 나는 몸살을 앓아야 했다. 그것도 잠시. 다음날이 되면 나는 어제 일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등교를 해야 했다. 정도를 걸어야 했던 엄격한 아버지 사전에 학교 결석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순종하는 수밖에.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 운동회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얼마 전, 손가락을 다쳤다. 옷장에서 옷걸이를 꺼내다 쇠 장식이 있던 옷걸이 사이 그 틈새 어딘가에 검지 손가락이 끼어버렸다. 바쁜 아침이었고,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이 낀 옷걸이를 무심코 확 빼버렸다. 뒤늦게 갑자기 찌르는 듯한 고통이 이어졌다. 빨간색 피가 슬며시 올라오더니, 금세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손가락이 베었다. 피를 닦고 보니 디긋자 모양으로 찢긴 살점이 달랑거렸다.


아.....

어이없음과 함께 몰려오는 나의 어리석음을 자책할 겨를도 없이, 다친 손가락을 가지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더 걱정이었다. 검지 손가락이 다쳤으니 몇 주간 아주 많이 번거롭게 되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내 오른쪽 검지 손가락은 베인 상처로 밴드가 쉴 날이 없다. 칼에 베이고, 종이에 베이고, 이것 저것 찾다가 어딘가에 찔리고, 찢기고 피나고를 반복한다.


이번 상처는 조금 오래간다. 한번 베이면 일주일이면 그만 일 텐데, 2주가 넘어가고 있다. 처음 지혈도 오래 걸렸다. 거의 나흘이 지났어도 상처에서 피가 났으니 깊은 상처임에 틀림없었다. 삼일 째 되던 날, 응급실에 가서 꼬매기라도 했어야 했나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다친 검지 손가락을 붕대로 압박을 한채 하루 일과를 했다. 아픔이 잘 가시지를 않았다. 손을 움직이며 일을 할수록 상처가 더디 낫는 느낌을 받았다. 붕대 때문에 이미 뚱뚱해진 검지 손가락은 어차피 방해만 되었다. 능숙하지 못한 다른 나머지 네 손가락을 따라다니며 조금 움직일 뿐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팠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친 손가락만 쉬는 게 아니라  오른손 전부를 쉬게 해야 한다고.


손가락 중에 가장 일을 많이 하고 손놀림이 좋은 것은 검지이다. 검지가 없으면 모든 일이 수월치 않다. 일을 제일 많이 하니 온갖 다양한 상처를 잘도 입는다. 그때마다 손가락을 제대로 쉬게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더디 낫는다.


어릴 적 나는 검지 손가락 같은 어린이였다. 일이 많고, 손놀림이 좋은 아이였지만, 노예처럼 쓰이고 쉼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검지 손가락처럼 일을 하다 몸도 마음도 많이 다쳤다. 재활이라는 이름으로 몇 년간 거의 일없이 쉬고 있었지만, 다른 종류의 일들로 또 몸과 마음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다. 자원봉사, 교회 봉사, 치과 공부, 개인 공부, 가족일 등등... 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 등을 돌리지 못하고, 불편한 마음을 다 내려놓지를 못하고 아픈 손가락에 붕대를 감고 여전히 일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제 나는 또 일들에 파묻혀 어릴 때처럼 억울한 마음이 되어 울고 있다. 이제는 잠시 쉬자.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다친 손가락은 낫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방해가 될 게다. 다친 손가락처럼 몸과 마음에 칭칭 붕대를 감았으니...


*검지 손가락처럼 일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바칩니다. 우리 조금 쉬었다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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