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애틀 닥터오 Apr 19. 2021

곧 다시 보자!

니키 리의 문자와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


며칠 ,  퀴즈   블록에 니키 , 아티스트가 초대 손님으로 나왔다. 배우 유태오의 아내이지만, 아티스트로서 뉴욕에 정평이 나있는 사람이었다. 작품 사진으로 뉴욕을 뒤흔든 그녀는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영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재능도 많고 열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삶을 대하는 태도뿐 아니라 남편에 대한 지극정성의 사랑에도 감복했지만, 그녀의 토크에서 가장 마음을 울린 것은,  인생 마지막으로 문자  통을 보낼  있다면, 누구에게 무엇이라고 보내겠는가에 대한 대답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문자는 남편 유태오 씨에게 였고,  내용은,


 ‘곧 보자!’


였다. 단 세 글자.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마지막이라 하면, 자신의 죽음 앞일 터인데, 그 말 한마디로 비장하고 심각한 상황을 날려 버렸다. 장황하게, “그동안 사랑했어,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해 줘. 나 없어도 씩씩하게 잘 살아.” 이런 말로도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나쁘지 않을 텐데... ‘곧 보자!’로 상황을 정리해버렸다. 그 말속에는 여타 다른 군더더기의 말도 필요 없는 미련도 후회도 없는 청량함이 있었다. 니키 리의 설명은 이랬다.


긴 문자를 남긴다면, 남겨진 사람이 그 문자를 보며 마음이 슬플지도 모른다고 했다. 배려심이었다. 짧은 그 세 글자 안에 사랑이 담겨있었다. 웃으면서 답했지만, 그녀는 마치 마지막 순간에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3년 전, 남편과 함께 새로 병원을 오픈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병원을 시작한 지 6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이었다. 남편과 나는 오픈하고 3년간은 다른 특별한 일을 만들지 않고, 일에만 전념하기로 한 상태였다. 평일 어느 날,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은행 업무를 보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운전 중이었기 때문에 핸즈 프리로 전화를 받았다.


“수진아, 할아버지랑 통화 좀 해봐!”

“네, 할아버지!”

“.....”

혹시, 잘 들리시지 않을까 하여 내 귀에도 시끄러울 정도로 말했다.

“할! 아! 버! 지! 말! 씀! 하! 세! 요!”

“... 수진아, 하늘 가서 보자...”

“...”


갑자기 나는 울컥하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운전 중, 시야를 가릴까 정신을 가다듬었다. 할아버지는 갑상선 암으로 마지막을 견뎌내고 계셨다. 암덩어리가 목과 성대를 눌러 말씀을 거의 못하시는 상태였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고 계셨다. 목소리라기보다는 숨소리였다. 나는 그냥 울어버렸다.


할아버지에 정이 없었던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 눈물이 안 날 수도 있겠다는... 그런데 나는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짧은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 앞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이 울어버렸다. 눈물이 앞을 가려 겨우 겨우 운전하여 병원으로 왔지만, 한동안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어 주차장에 힘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할아버지 집에 가면 나는 꼭 큰절을 해야만 했다. 큰 절을 하지 않으면 어른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라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6.25 참전을 하신 유공자셨고, 전쟁 트라우마가 있으셨지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신앙을 지키시기 위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숨기시고 성실히 신앙을 이어가셨다. 무뚝뚝하시고 말이 없으셨지만, 자식들, 손주들에게 보낼 자연산 꿀과 곶감, 밤, 고춧가루를 가을과 겨울마다 챙겨주시느라 사계절 내내 분주하셨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나이가 들면서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도 당신 나름대로 사랑을 나누어 주고 계셨다는 것을.


그리고 그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속에서 다시 그분의 마음을 느꼈다. ‘하늘 가서 보자!’


한 번도 나에게 마음 따뜻한 말씀 한번 건네신 적이 없으셨다. 할아버지가 가정 예배 때나 평소 말씀을 하실 때면 나는 주눅이 들었었다. 할아버지의 표준은 항상 높고 나의 수준은 바닥이었으니.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는 마지막 덕담으로 희망을 이야기하셨다.


할아버지는 땅의 모든 미련을 다 내려놓고 나에게 다시 보자는 한마디 하시고는 숨을 거두셨다. 그 해에 마지막 남은 꿀 한 방울을 먹으며 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이제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꿀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또 한동안 울적해졌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래 할아버지, 곧 볼 수 있겠지!


할아버지에게 큰 정은 없었지만, 그동안 내가 받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내 안에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까무잡잡한 작고 마른 얼굴에, 왜소한 키를 한 할아버지는 집안 구석구석, 논과 밭, 산을 다니시며 당신의 손과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도록 하셨다. 그토록 바지런히 다니셨던 그분의 모습은 아직도 내 마음에 생생하다.


니키 리의 마지막 문자, ‘곧 보자!’는 말이 3년 전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로 다시 들려오는 오늘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