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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애틀 닥터오 Aug 04. 2021

나는 농사꾼의 딸이다

아버지는 아직도 농사를 하신다


우리 아버지는 10대 초반부터 농사에 발을 들이셨다.

그 당시 대농을 하시던 작은할아버지의 밑으로 들어가 농사일을 배우셨다. 그 어린 나이에 손발이 둔하다고 많이 맞으셨다고 한다. 십 대의 나이에 농사를 배우는 일이 당연히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에 한이 맺히셨는지 아직도 귀에 피딱지가 앉을 정도로 이야기하신다.


예전 우리나라의 체벌은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개념치 않았다. '아이는 맞으면서 커야 한다'며.


아이들은 교육과 양육이라는 핑계로 어른들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체벌을 하면서 그 어떤 어른도 화를 내지 않으면서 부드럽게 가르치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 아버지도 농사일을 배우시면서 많이 맞았다.


아버지는 20대가 되면서 작은할아버지의 논을 소작하며 돈을 조금 모아 결혼을 하셨다. 1970년대에 양복과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하는  흔치 않았지만, 친척과 동네 어르신들의 부추김 때문에 시골 산골의 가난한 양반집  아들은 돈이 없어도 시끄러운 결혼식을 치러야 했다.  사정이야 그렇다 해도 우리 부모님은 멋진 결혼식 사진이 있다.  결혼식을 했냐 안했냐가  대수겠냐마는.


신혼집은 작은할아버지의 소작농 전용 기숙사 같은 집에서 시작하셨다. 부엌이 두 개 널따란 방이 2개, 작은 방이 2개였다. 한쪽 편은 작은 할머니의 조카 부부가 와서 살았고, 다른 한쪽은 작은할아버지의 조카 부부가 함께 살면서 소작일을 했다. 그 부부가 우리 부모님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쪽 집 부부는 몇 년 후, 농사를 그만두고 나가버렸다. 그 이후, 그 큰 집은 우리 차지였다. 그 당시 흙집과 초가집들이 즐비했던 농촌에서 시멘트로 지어진 그 집은 동네 사람들은 물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두세 번씩 쳐다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친하던 여자 친구와 남자 친구를 우리 집으로 데려왔던 적이 있었다. 그중 남자 친구가 우리 집을 다녀간 후, 수줍어서 나에게 직접 말은 못 하고, 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전해 들었었다. 순수한 소년이 하루 만에 사랑에 빠지게 되는 시멘트 집의 위엄이란.


80년대가 되었을 때, 작은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그 시멘트 집보다 머리가 하다 더 높이 올라간 큼직한 창고를 집 옆으로 이어 붙여지어 주셨다. 그 안에는 쌀 건조기, 경운기, 트랙터, 자가용까지 들어가고도 넉넉하게 남았다. 대문도 없고 페인트 칠도 안 된 집이었지만, 그 창고 덕분에 그 집은 더 웅장해 보였다. 크기 때문에라도 그 당시 우리 집을 하찮게 볼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 크기와 걸맞게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먹을 것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 지금이야 보통 집에 냉장고가 두세 개 있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80년대에 우리 집은 냉장고가 두대였고, 음식 창고가 따로 있어서 농사철 일꾼들이 배부르게 배를 채울 수 있었고, 덩달아 우리도 통통하게 살을 찌웠다.


가끔 사람이 뜸한 오후쯤에는 동네에 용기 있는 초등학교 고학년 오빠들이 서리를 여러 번 시도했었다. 방 안에서 숙제를 하다가 엄마의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나가보면, 가난한 집 동네 오빠가 라면을 훔치다가 현장에서 딱 걸린 것이었다. 엄마는 그냥 도망가게 놔두었지만, 나는 '훔치다 들켜버린 라면이라도 들려 보내지.’라고 생각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그 오빠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50년 가까이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부모님은 그 집에 아직까지 살고 계시다. 농사를 못 놓으시고.


다른 옆집들은 죄다 현대식으로 새로 짓고 안팎을 개조하여, 아파트 부럽지 않게 널따랗게 거실을 놓고, 번쩍번쩍하게 이중창으로 보온하고 철문으로 보안을 장착할 때, 70년대 잘 나가던 일명 쓰레트 집은 대문도 없고, 이중창도 없고, 바깥벽은 기울어진 그 상태로 반세기가 흘러 버렸다. 예전의 그 웅장함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부모님은 당신 집이 아니어서 정도 없고 고치기도 싫으시단다. 쓰러지면 쓰러진 대로, 생존에 문제가 없다면, 미관 따위 전혀 신경 쓰시지 않으셨다.


다만, 어느 동네 아저씨들이 아버지의 집을 비웃었을 때, 나는 마음이 많이 아렸다.


언젠가 시멘트 집이 너무 춥다고 돈을 조금 들여 작은 방 두 개를 터서 하나로 크게 만들어 보온을 더하고 편백나무를 붙이고 아궁이가 있던 흙바닥의 부엌에 보일러를 깐 현대식 키친으로 개조했다. 밖은 색 하나 없는 시멘트가 훤히 드러나 있긴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그나마 개조해 놓은 곳에 식탁이며, 소파며, TV, 에어컨 등이 갖추어져 있다. 이제는 다른 이웃집과 비교하면 부모님이 사시는 그 시멘트 집은 다 쓰러져가는 판잣집이나 흉가 같은 모습이다. 아쉽게도 예전의 영광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게 아쉬운 아버지는 오토 리플레이를 세팅해 놓은 오디오처럼 예전의 영광만 끊임없이 되풀이하신다. 토시 하나도 틀림없이.


이 집의 주인은 아직도 작은할아버지 소유다. 몇 년 전 돌아가셔서 소유권이 큰 당숙에게로 갔지만, 전세도, 월세도 없고, 주인이 수리도 안 해주고, 나가라는 독촉도 없는 희한한 집이다. 아버지는 처음 시작한 소작 땅보다 지금은 아주 조금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아직도 작은할아버지의 논을 소작하고 계신 데다가, 사 남매를 교육시키고 출가시키느라 늘어난 빚을 이제 겨우 다 갚아나가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집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소작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신다.


칠순을 넘어 이른을 훌쩍 넘기신 아버지는 아직도 농사를 내려놓지 못하신다.


자식들에게서 용돈이 어느 정도 오기는 하지만, 빚만 갚다 끝내는 인생이 힘겨우신 건지, 아니면 스스로 벌어 조금씩 불어나는 숫자를 보며 소확행을 하고 싶으신 건지, 일평생을 바쳐 일궈낸 땅과 집을 내려놓기가 힘드신 건지, 아직도 은퇴를 못하시는 이유를 시원스럽게 꼭 짚어 말씀하시지 않는다. 수년간 자식들의 설득으로 내년에는 소작을 그만두고 당신이 소작을 내겠다고 하시지만, 믿을 수가 없다. 매년 봄 종자벼를 고르러 가시면서 계속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부모님이 논에서 일하시다 혹시 쓰러지실까 걱정된다. 고령에 당뇨와 고혈압이 있으신 아버지가 농사일을 하시는 것이 우려스럽다.


사람이 일평생 하던 일을 내려놓는 것은 쉽지 않나 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농사꾼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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