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여울 작가님 추천으로 읽게 되었다. 이 소설집에서는 마지막 소설 "아치디에서" 가 가장 좋았다. 낯선 타지에서 일어나는 이국적인 배경이 매력적이었다. 소설 속 주인공은 한국 사람이 아니다. 브라질 사람이다. 대학 중퇴생으로 대마초와 게임에 취해 무기력하게 살아온 랄도라는 브라질 청년은 여름에 만난 아이랜드 여성과 사랑에 빠져 무작정 아이랜드로 떠난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랄도에게 여자는 냉정하게 대하며 떠나라고 한다. 돌아오려는 길에 랄도는 화산 폭발로 공항에 발이 묶이게 된다. 엄마에게 의지해 살아오던 랄도에게 엄마는 더 이상 지원을 할 수 없다며 카드를 다 끊어버린다. 돈이 필요하게 된 랄도는 운이 좋게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그곳에서 랄도는 한국 여자 하민을 만나게 된다.
간호사로 일하던 하민은 한국에서 불행한 생활을 하여 아치디로 도망을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곳으로 오게 만든 것은 비인간적인 간호사로서의 모습이다. 하민은 삼교대로 돌아가는 병원에서의 과도한 노동과 요청들 속에서 어느 순간 환자들의 감정적 요구를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아들을 위해 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가족의 분위기로 인해 모아둔 돈의 대부분을 오빠의 결혼자금 명목으로 빼앗긴다.
타인과 자기 감정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는 걸 충격적으로 인지한 후 한국을 떠나온 하민. 그리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랄도는 비로소 브라질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은 랄도 역시 하민의 오빠가 하민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나 마리솔을 외롭게 하며 감정 노동을 무의식적으로 요구해왔던 "가해자"이고, 작고 마른 체구에 조용한 성품으로 태어나 아버지에게는 계집애 같다는 이유로 못마땅한 대상이 되고 학교에서는 괴롭힘을 당했던 "피해자" 였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랄도는 짧은 순간이지만 하민에게 이런 과거를 털어놓는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지지 않아 놀라고, 그 고백의 끝에 하민이 울면서 걷고 있다는 걸 느끼지만 왜냐고 묻지 못한 채 다만 속도를 늦춰 걷는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아치디에서" 는이 질문을 던진다. 평론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사랑은 다만 상대 앞에서 자신의 가장 약하고 수치스러운 감정을 노출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그 곁에 침묵하며 함께 서 있는 것, 대신해 우는 것, 조금씩 속도를 늦춰 걷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둘은 재회하지는 않는다. "넌 네 삶을 살 거야" 라는 하민의 담담한 마지막 말 앞에서 우리는 마음이 시린다. 최은영은 관계가 연결되고 넓어지는 지점이 아니라 단절되는 지점을 섬세하게 그려나간다. 하지만 우리들의 인생은 헤어짐과 만남의 연속이라고 생각하면 의연하게 걸어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