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책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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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은 문학 수업 때문에 읽게 됐는데 우리 나라에 이런 시인이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다. 따뜻한 서정시, 혹은 감각적인 현대시를 기대하는 사람에게 문보영의 서사 중심 전략은 무척이나 낯설게 다가온다. 특이한 상상력을 선보인 젊은 시인으로 그리고 기획력이 있는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진지하면서 명량한 이 시인을 좋아하게 되었다. 몇 가지 시를 소개하고 싶다.


1. 벽.

벽을 앓는 모든 것은 집이 된다. 벽에 중독된 모든 것은 벽이 된다. 누구나 벽으로 태어나 벽으로 살다가 벽으로 죽듯 벽은 반복되고 벽은 난데없다. “꽃이 펴도 당신을 잊은 적 없습니다” 이런 문장은 위로조로 읽어야 할까 공포조로 읽어야 할까. 벽은 쓰러진 측백나무와 대답 없는 편지를 좋아해. 아니, 쓰러진 측백나무와 대답 없는 편지를 좋아하는 것은 벽. 벽을 뚫으면 벽이 딸려 나오고, 세상 모든 문장의 종지부와 벽은 또 어떻게 다를까? 봄이 개과천선한들 봄은 봄이듯 멀리 있는 모든 것은 벽. 하나의 벽은 다른 벽을 해명하는 데 일생을 걸지만. 벽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고. 아니,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것은 벽. 벽은 의도가 없고, 벽은 간이 붓고 싶고, 벽은 늘 위독해. 벽은 믿을 수 있는 만큼 아프고 믿을 수 있는 만큼 헤어진다. 벽은 언제나 넘치거나 모자라다. 벽이 벽을 실토하는 사이 벽은 어디로 갔나? 벽은 벽을 벗어도 벽이 되었다.

벽을 인간으로 바꿔도 인간이 지닌 속성과 같다고 하네요.

2. 호신

사람 a 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읽어 버리면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까 봐

책을 읽지 않았다


도서관도 사람 a 를 도왔다.


책 2권, 3권,4권…

책 2권, 3권,4권…

책 2권, 3권,4권…

책 2권, 3권,4권…

책 2권, 3권,4권…


도서관의 모든 책이 2권부터 시작했다.

시작을 막는 멋진 책이군

사람 a는 생각한다.

도서관은 모든 책의 1권을

쇠사슬로 묶어 지하 창고에 숨겼으며
개와 바람으로 그 입구를 지키게 했다.


도서관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고

책을 배불리 먹은 도서관은 조금식 덩치가 커졌으며

사람처럼 숨을 쉬기 시작한다


하나의 생명력이 탄생하는 이야기이지만, 괴물적인 이미지가 더 돋보이는 것 같다.


3.
삼각형 외부의 점은 처치 곤란했다

그것은 태어남 자체가 부주의했음으로
사람 a 는 창밖으로 쓰레기를 던졌다

가능한 한 멀리 던졌지만 쓰레기는 되돌아왔다

외부의 점이 허기를 느꼈다

점이 공복을 느끼는 게 가능할까

점은 지능이 없는데 어떻게 비명을 지르고 있을까

사람 a 는 냄새나는 쓰레기를 창밖으로 던져 내부에 있던

것을 외부로 바꾸었다

점이 아파한다

삼각형 바깥에 의외의 점을 찍는다

무고한 점의 바보 같은 질문


누가 나를 찍어 놓고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는

놀랍고 음산한 점이 어떤 공간을 의식하고 있는



4.
버스 뒷자석에 여고생 둘이 앉아 있다

은성아, 지금 몇 시야?

4시 24분


사람 a는 속상하다

세상이 지금 몇 시인지, 그런 무서운 이야기는 알고 싶지 않은데…

사람 a는 생각한다.
지구의 반지름은 대략 6400km이므로

원둘레 공식 2πr 을 활용해 지구의 둘레를 구한 후,
24시간으로 나눈 결과 지구는 시속 1674km로 달리고 있다

따라서

지구가 달리는 방향과 정반대로 시속 1674km 의 속력을 내야만
우주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 a도, 우주도 평화롭고 정적인 상태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 a는 세상을 까먹기 위해

거침없이 달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왜 지금이 몇 시인지 말하는 것일까?


시간이 흐르는 것에 대해서 감각하고 싶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정적인 상태로 남고 싶을때가 있지 않아서 그런가?

5. 진짜 눈물을 흘리는 진짜 당근

어떤 사람이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갔다

당근다운 당근이 한 개도 없었다

그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떤 사람이 과거를 지울 수 있다 믿으며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간다

천사들이 당근 가게에 난입했다

비가 내렸다

천사들이 우산을 꺼냈다

당근들이 진짜 눈물을 흘렸다

흘러내리는 과거를 손수건으로 닦을 수 있을까?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당근을 사러 당근 가게에 간다

쌓아 놓은 나뭇단 옆, 날개 달린 천사들이 죽치고 앉아 있다

충분히 자 두어야 해

그들 중 하나가 낮은 음성으로 말한다

나머지는 우산을 가지고 논다

노래를 부른다

우산 대신 세계를 접었네

그게 좋아서 우리는 계속 계속 접네


천사들이 채소 가게에서 사람들을 용서하고 있다

당근이 울었다

울지 않는 당근도 있다

하늘에서 떨어진다

당근을 사러 간다

천국이 몇 개인지 세어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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