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의 고급 한국어 수업 시간에 다룬 책인데 이제서야 북리뷰를 올립니다. 저자는 20년 넘게 단행본 교정 교열 일을 하신 분이며 "동사의 맛" 이라는 책도 쓰셨습니다. 교정교열 관련 많은 팁이 나오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문장을 쓸 때 유의해야할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죠. 주어와 술어가 호응하도록 배치해야 하고 관형사나 부사처럼 꾸미는 말은 각각 체언과 용언 앞에 제대로 놓아야 하며 수와 격을 일치시켜야 하는 등 신경 써야 할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있습니다. 너무 당연해서 원칙이라고 여기지 못하는 원칙. 그건 누구나 문장을 쓸 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써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누구나 문장을 읽을 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어 나간다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문장을 읽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문장을 쓰는 방법도 그와 다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한글 문장은 영어와 달리 되감는 구조가 아니라 펼쳐 내는 구조라서 역방향으로 되감은 일 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계속 풀어내야 합니다. 영아가 되감는 구조인 이유는 관계사가 발달했기 때문이죠. 관계 부사나 관계 대명사를 통해 앞에 놓인 말을 뒤에서 설명하며 되감았다가 다시 나아가는 구조가 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한국어에서 관계사라고 할 만한 건 체언에 붙는 조사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한글 문장은 되감았다가 다시 나아갈 이유가 없습니다.
The man who told me about the murder case that had happened the other day was found being dead this morning.
일전에 벌어진 살인 사건에 대해 내게 이야기해 준 그 남자가 오늘 아침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위의 영어 문장이 관계사를 중심으로 두 번이나 되감기면서 의미를 확장해 나아갔다면, 한글 문장은 계속 펼쳐졌습니다. 영어 문장이 되감기는 공간으로 의미를 만들었다면 한글 문장은 펼쳐 내는 시간으로 의미를 만든 셈입니다. 그러니 한글 문장은 순서대로 펼쳐 내면서, 앞에 적은 것들이 과거사가 되어 이미 잊히더라도 문장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문장 요소들 사이의 거리가 일정해야 합니다.
호흡이 긴 스페인어 번역을 하면서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만, 항상 위의 원칙이 100% 적용이 되지는 않습니다. 번역을 할 때는 예를 들어 문장을 a, b, a2 로 구분을 합니다. 아래는 계약서 법률 번역입니다.
El presente contrato entrará en vigor en la fecha indicada al final del mismo; no obstante a)el comodato de LA MUESTRA iniciará a partir de la fecha de entrega de aquella al (a los) delegado(s) de EL MNC en EL MUSEO en Bogotá, D. C.,b)lo cual constará en el acta de entrega y recibo que suscriban el (los) delegado(s) de las partes para tal fin, previa suscripción del presente contrato,a2)y se extenderá hasta la fecha de devolución de LA MUESTRA por parte a el (los) delegado(s) de EL MNC al (a los) delegado(s) de EL BANCO en EL MUSEO en Bogotá, D. C., a más tardar el 30 de marzo de 2019, inclusive.
a)La muestra 의 임대는 본 계약 체결 이후 보고타 DC 에 있는 El Museo 에서 El Banco 가 MNC 위임인들에게 La Muestra 를 인도하는 날부터 시작되며, b) 이 같은 내용은 양측 수임인이 muestra 를 인수하며 서명하는 인수인계 확인증에 명시되어야 한다.A2) 임대는 MNC 위임인이 La Muestra 를 El Banco 위임인에게 보고타 D.C 에 있는 El Museo 에서 반환활 때까지로 2019년 3월 30일끼지 (30일 포함)는 반환이 이뤄져야 한다.
번역을 할 때 아래 명언을 생각합니다.
인생은 B 와 D 사이의 C 이다.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선택입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자 알고보니 우리 통대 스페인어-한국어 법률번역 교수님의 번역 철학이기도 합니다. 이젠 저의 철학이 되기도 했습니다.
번역을 잘 하려면 선택의 가지수가 많아야 합니다. A 라는 문장을 번역할 선택지가 2 개인 사람과, 선택지가 10 개인 사람은 결과에서 차이가 납니다. 10 개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고른 사람은 퀄리티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선택지를 넓히는 연습을 하면 좋습니다. 번역은 창의적입니다. 문제를 푸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수 많은 어휘 중에서 가장 적절할 어휘를 찾아야 하고 수 많은 구조 중에서 가장 적절할 구조를 찾아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번역이 아닌 일반적인 글을 쓸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Chat GPT 보다 번역사가 나은 이유는 기계보다 더 창의적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계가 갖고 있지 않는 감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