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 초입의 밭마다 노란 국화가 그득하다. 국화차를 만들기 위해 어린 꽃송이를 따는 작업이 한창이다. 알싸한 향기에 취해 걸음을 옮기는 사이, 한 두 방울씩 비가 듣는다. 꽃을 따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해진다. 걸음을 재촉하는 나를 어머니가 가만히 잡아끌더니 가방을 여신다.
몇 년 전 생일날 사드렸던 꽃무늬 양산이 접힌 채로 얌전히 들어 있었다. 따가운 봄 햇살에도, 한 여름 폭염에도 한 번도 펴지 않으시더니 가을비를 가리려 아껴둔 양산을 편다. 좁은 양산 아래 모녀는 어깨를 바싹 붙이고 산길을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져 양산이 젖어갈수록 물을 가득 머금은 꽃잎들은 선명하게 피어난다. 키가 큰 나와 키 작은 어머니가 좁은 양산에 의지해 빗길을 함께 걷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느린 어머니 걸음에 보폭을 맞추고 천천히 걷는다. 어깨가 젖지 않도록 양산을 기울이면 어머니는 내 쪽으로 양산을 슬쩍 밀어 보낸다.
대웅전에 이르자 어머니는 양산을 접어 물기를 탁탁 털고는 툇마루 옆에다 비스듬히 세워두고 안으로 들어가신다. 속바지 안에 접어 둔 지폐를 꺼내 불전함에 올리고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린다. 오래전부터 무릎이 아프다고, 앉고 설 때 마다 절절 매시더니 거짓말처럼 사뿐사뿐 엎드렸다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고 두 손을 하늘을 향해 치켜 올리는 모양새가 날아갈 듯 가볍기만 하다. 속세에서 디디는 땅과 절집의 땅은 어머니께는 전혀 다른 세상인 듯싶다.
봉황이 내려앉은 자리에 세웠다는 봉정사는 크고 화려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건물들의 양식과 역사적 가치만으로도 아름다운 절집이다. 세월이 중첩된 오래된 건물들을 품고, 그저 묵묵히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 흔적들이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보물이 되고 지켜야할 소중한 역사가 되었다.
가치 있고 귀중한 문화재를 만나는 일은 멋지고 기품 있는 사람을 마주 대하는 것처럼 기분 좋고 가슴 설레는 일이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다. 마당 한쪽에 차일을 치고 직접 키워 만든 국화차를 우려서 대접하고 있다. 뜨거운 물이 닿자 사르르 피어나는 꽃잎은 살아 제 힘으로 피어 있을 적 보다 더 곱다. 날것의 생생함은 오래 가지 못한다. 마른 제몸에 지닌 향을 고스란히 풀어놓는 국화차의 향으로 마음이 훈훈하게 덥혀진다.
가파른 돌계단 길을 조심스레 올랐다. 봉정사의 부속 건물인 영산암은 웅장하고 엄숙함이 주는 절집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아 눈이 편하다. 반송이 바라다 보이는 송암당 낮은 툇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보노라니 한없이 푸근하고 정겹다.
이생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아시고, 어머니는 봉정사에 오고 싶어 하셨다. 어머니의 삶을 뒤따라 걸으며 닫힌 듯 막힌 듯 답답할 때가 많았다. 늙어 가는 어머니의 초라한 뒤를 바라보는 일은 힘에 겨웠다.
늙고 병든 어머니와 봉정사에 함께 와보고서야 알겠다. 낡고 오래된 것에 담긴 세월의 무게와 깊이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세월은 그저 쌓이는 것이 아니라, 견디고 버티고 지켜낸 후에야 빛나는 보물이 된다는 것을.
가을비는 비는 그칠 기미도 없이 마당의 흙 위에다 동그란 꽃잎을 그린다. 꽃잎처럼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우화문을 나선다. 꽃무늬 양산을 쓰고 저만치 앞서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고와서 마음이 아린다. 그 마음을 아시는지 다독이듯, 속삭이듯 어깨위로 비가 내린다. 말없이 걷는 어머니와 나 사이에도 꽃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