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서평. 줄거리 요약-스포일러-이 존재합니다.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기.
한강 작가를 떠올릴 때마다 강렬히 다가오는 지점 있습니다. 상상력입니다. 정밀한 묘사를 하기 위해선 그에 맞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한강의 묘사는 언제나 정밀하고 생생합니다. 채식주의자, 검은 사슴, 소년이 온다… 등등의 작품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문장은 시선을 따라 펼쳐집니다. 한강의 책을 펼칠 때마다, 아니 어쩌면 사거나 빌리러 갈 때마다 저는 거북함이 생깁니다. 그가 “그걸 펼치고 싶지 않다. 어떤 호기심도 느끼지 않는다. 그 페이지들을 건너가라고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복종할 의무가 나에게 없다.”라고 285페이지에 적은 것처럼요.
한강은 자신이 떠올린 장면과 아픔을 참습니다. 묘사하려면 참고 글로 옮겨야 합니다. 작가는 한 걸음씩, 또 한 걸음씩 묘사 속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때론 꿈속으로, 또 현실 속으로 악몽은 침투하기도 합니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23)라며 스스로에게 되묻는 모습을 보면 읽는 독자로 하여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저는 이 소설의 주제를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라고 정하고 싶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목공방을 운영하던 ‘인선’의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갑니다. 인선은 목공을 하던 도중 손가락을 잘리게 되는데요. 인선이 주인공을 급하게 병실로 부른 이유는 ‘나’의 추측과는 다르게 새를 살려달라는 이유였습니다. ‘나’는 인선의 부탁을 받아 ‘새’ 한 마리를 살리러 당일 오후 비행기를 타고 인선이 살던 집인 제주도로 날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로 인해 버스 배차가 늦어지고 심지어는 밤늦게 휴대폰 불빛에 의지해 집을 찾다가 눈 밭에 굴러 휴대폰조차 잃어버리게 되죠.
그럼에도 그가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탁받은 ‘새’ 때문이었습니다. 새를 살리기 위해 다시 정신을 붙잡고 빛이 들 때까지 눈 속에서 기다렸던 ‘나’는 끝내 목공방의 불빛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새는 죽어 있었고, ‘나’는 새를 상자 속에 묻어줍니다. 이후 ‘나’는 잠에서 깨어납니다.
거기엔 죽은 새 ‘아마’와 서울서 치료를 받고 있는 인선이 있습니다. 인선은 어둠 속에서 초를 찾아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4.3 사건 당시 헤어졌던 외삼촌에 관한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엄마는 계속해서 외삼촌의 흔적을 찾고 있었습니다. 하나의 촛불에 의지하여 인선의 어머니가 외삼촌을 찾기 위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모아둔 4.3 당시부터 보도연맹 사건 기록까지 기록을 하나하나 읽어나갑니다.
좀 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49)
누구나 해결하지 못해 끌려다니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을겁니다. 제대로 들여다보기 겁나서, 두려워서, 놀랄 것만 같아서 우린 고통을 회피하고 삽니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고통이 주는 고통일 겁니다. 우린 고통을 바라보면 더 아플 것 같아 고통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그런 이유에서 경하(나)가 말하는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말은 누구나 공감하는 말일 겁니다.
고통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고통은 제대로 들여다봐야 작별하지 않습니다. 마치 인선이 3분마다 한 번씩 주사를 손에 맞는 고통을 느껴야 절단된 손가락이 언젠가 회복되는 것처럼요. 마치 손가락을 그대로 잘라둔 채로 내버려버리면 손가락의 고통은 평생 남아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것처럼요. “땅에서 넘어진 자, 땅에서 일어서야 한다”는 지눌 선사의 말처럼 고통 역시도 고통받은 곳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은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습니다.
주인공 경하는 고통에서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처음은 5,18에 관련된 소설을 쓰던 작가에서, 이젠 유서를 쓰며 자신의 고통을 마주합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고통에서 인선의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인선의 고통에서 새의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새의 고통에서 집을 나갔던 인선의 고통으로, 인선의 고통에서 인선의 어머니의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어머니의 고통에서 4.3 속의 한 어린 여성으로 건너갑니다. 4.3 이후 고통받은 보도연맹 희생자들과 대구교도소 희생자들의 기록으로, 그리고 치매 초기에도 여동생을 잊지 못해 자신의 딸을 여동생으로 착각하며 손가락을 물려주던 고통으로 건너갑니다.
경하는 매 순간 성실하게 고통을 참습니다. 3분마다 맞아야 하는 주사를 참듯, 고통을 참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선이 새가 죽을 테니 오늘 당장 모이를 주러 가라고 해도, 단 한순간도 자신이 사랑해보지 못한 새라고 해도, 위경련 때문에 아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고통에 대한 성실함은 더 큰 고통을 꺼내오는 듯 하지만 경하는 작별하지 않습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 사실들은 잊히고 맙니다. 아니, 잊힌다기보다는 절단된 손가락이 아픈 채로 남아있는 것처럼 그럼에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아픔을 그대로 남긴 채 사회는 흘러갑니다. 마치 아무런 아픔이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인선과 경하(나)는, 그리고 인선의 어머니는 계속 아픔을 마주하려고 분투합니다. 거기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가 있고, 돌아오지 않은 외삼촌이 있고, 만주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한 할머니의 고통이 있고, 베트남 밀림 속에서 사는 한국군 성폭력 생존자들의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경하는 눈 속에서 깨닫습니다. 고통을 견디게 하는 건 그 생명이 견디고 있는 고통을 떠올릴 때 마음속에 이는 불이라는 것을요. 이제 경하의 눈에는 보입니다. 아니, 실제로 보입니다. 인선의 어머니가 견딘 고통이, 고통 너머의 고통이, 사실 외삼촌뿐만 아니라 외삼촌 이상의 무언가와 작별하지 않으려고 버틴 고통이 이제 보이기 시작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보기’라고 봅니다. 한강은 먼저 제대로 들여다봅니다. 온몸을 다해, 고통이 꿈으로, 또 현실로 넘실 거릴 정도로 사력을 다해 고통을 제대로 들여다봅니다. ‘소년이 온다’에서 나타난 생생한 묘사, ‘채식주의자’에서 나타난 세밀한 묘사, 그 모든 묘사들을 먼저 느끼고, 껴안고, 직면한 채 더 힘차게 현실로 나아갑니다. 그 고통들을 마주하면서 말입니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 발자국 건너, 또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경하가 1948년 증언들을 펼치지 못하고 건너뛰었다가, “그걸 펼치고 싶지 않았다”라고 했다가, 그 고통을 누군가 먼저 보고 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한 발자국. 그래서 또 한 문장, 또 한 문장을 적고, 또 마주하고,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내고 표현하는 그 모습이 작별하지 않는 투쟁으로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에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용기 있는 상상력은 역사의 절단된 아픔을 깨우치게 만드는 주사와 같습니다. 주사를 앞둔 환자처럼 작가의 책은 언제나 겁이 납니다. 그러나 주사를 맞고 신경선을 계속 이어가다 보면 언젠가 손가락을 쓸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심장 같은, 고동치는 꽃봉오리 같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 같은, 불꽃’이 셈 솟아 더 큰 고통을 볼 용기가 셈 솟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활주로 아래 묻혀있던 4.3 희생자의 시체의 고통에 동일시되고, 꿈속에서 고통을 마주해 현실에도 영향을 끼치고, 인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먼 곳에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왜 고통을 마주하려고 했는지 깨달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열심히 살리러 갔으나 결국은 새가 죽는다고 해도, 4.3과 보도연맹 사건이 지금의 역사와 무관한 것처럼 보여도 잊지 않고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요. 지금 사회가 아픈 것이 어떤 역사의 굴곡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 주사 같은 아픔을 꺼내고 아파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사람은 확실히 죽었다고 생각해도 우린 계속 작별하지 않고 죽은 자와 이어져있으려고 상징들을 남기고, 인선과 경하가 했던 것처럼 나무들을 심을 수 있을까요.
리뷰를 끝내고 나니, '고통을 껴안지 못해도 좋다. 고통을 껴안을 수 없어도 좋다. 그렇게 작별하지 않을 뿐'이라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아마 남은 건 제 안의 비겁함일 뿐일 겁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작별하지 않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제대로 작별할 수 있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