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제로썸 게임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한국 사람들은 왜 명품을 좋아할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빠른 결과주의”가 한몫하는 것 같다. 학창 시절만 생각해 봐도 나는 ‘옷’으로부터 차별받는 경우가 있었다. 노스페이스 패딩, 카파 츄리닝, 아베크롬비. 어렸을 적 가장 빨리 힘을 갖는 법, 가장 빨리 소속감을 획득하는 법, 무시하지 않게 만드는 법은 다름 아닌 ‘옷’이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학창 시절의 ‘명품’ 혹은 지금 ‘계급도’로 만들어진 ‘상위 티어’의 품목들은 그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나를 중심부로부터 밀려나지 않게 만드는 빠른 해결을 위한 상품, 품목. 이건 단연코 ‘허세’와 무관하지 않다. 누군가에겐 그게 생존이었을지 모르고, 누군가에겐 그게 중심부로 이탈하지 않는 보증상품이었을지 모른다.
이렇게 자란 30-40대가 커서 계급도를 만드는 현상은 사실 이상하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이 중심부인가- 집단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중심부에서 밀려나는 건 사실 사망선고(특히 스마트폰이 나오기 이전, 학연 지연 혈연이 강했을 때는 더더욱)와 같았던 지라, 이 ‘명품’은 생존품에 속했을 수 있다. 우리는 학교에서 밀려나는 이들을 보았고, 관찰자였고 혹은 피해자였다.
물론 나는 이 모든 현상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이게 좋다-는 뜻도 아니다.) 빠른 성장과 해결중심주의에서 ‘과정’이라는 건 무시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 과정의 멸종 그러니까 명품으로 인간관계를 처리하는 과정의 멸종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사실 이 근원으로 돌아가보면 정치적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싶다.
힘이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식. 과정은 모두 생략되어도 되는 방식. 누군가 죽어나가거나 조금 부실해도 일단 넘기는 방식. 이 방식들은 나는 비단 어렸을 때부터의 경험에서부터 온 듯싶다. 주먹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학교 생활부터 옷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방식까지 우리는 어렸을 적부터 이 ‘힘’의 논리를 보아야 왔다. 이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온 사람들을 보았거나 혹은 스스로 그렇게 문제를 해결해 왔다.
문제는 사회는 그 방식을 용납했다는 점, 전혀 비판하지 않았단 점이다. 우리의 제로썸 게임은 그렇게 엄마를 졸라 아베크롬비와 700 패딩을 사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힘이 없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밀어내고 낙인찍는 것으로부터 시작 됐다. 아니, 그저 목격하거나 폭력을 가해도 문제가 없는 그 상황부터 시작됐다.
힘을 모으게 닦달했던 상황. 주변부로 밀려나면 문제가 되는 상황. 여전히 대한민국은 닦달하는 듯싶다. 당신, 더 큰 힘을 가직라고. 힘을 가지지 못하면 부모 탓이라고. 없으면… 없으면 어떻게든 모아 오라고. 과연 이 제로썸 게임은 어디서부터 어그러졌을까. 밀려난 이가 자신의 힘으로 저항했음에도 넋 놓고 봤던 선생? 목격자? 혹은 더 큰 힘으로 밀어낸 사람들? 그럼에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에- 희망을 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