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사람일수록 더 자기 편에 서야한다.

by 시몬 베유

착한 사람일수록 더 자기 편에 서야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사람이… 그러니까’라는 마음에 휘둘리는 순간, 선의는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한 가정을 보자.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고, 어머니가 딸에게 말한다.


“그래도 아빠가 불쌍하잖아....”


이때 딸의 마음에는 세 갈래의 신호가 동시에 들어온다. 어머니의 말(참아라), 어머니의 감정(불쌍함), 아버지의 현실(폭력). 어느 신호를 따라야 하는가? 딸은 평생 삼지선다 속에서 헤맨다.


이 경우, 딸이 해법을 아무리 가져와도 풀리지 않는다. 인문학과 페미니즘을 배워 “엄마 이렇게 해봐. 저렇게 해봐.”라고 지식과 조언을 쌓아도, 어머니 자신의 목소리가 비어 있으면 결론은 늘 제자리다. “그런데… 아빠가 불쌍하니까.” 조언은 방향이 아니라 핑퐁이 되고, 딸은 지쳐 떨어져 나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 또한 딸을 지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말이 비어 있는 환대는, 결국 폭력의 목소리만 남기는 결과를 낳는다.


환대를 말한 철학자들은, 환대란 누군가의 말을 지워주는 친절이 아니라 서로의 목소리가 공존하도록 자리를 만드는 행위라고 했다. 그 정의에 비춰 보면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어머니는 딸을 환대했는가? 어머니가 스스로의 주어를 포기하는 동안, 가족의 장(場)에는 아버지의 의중만 남아 증폭되었다.


여기서 비극은 엄마 역시 ‘착한 마음’으로 가정을 지키고 싶었단 점이다. “착한 사람은 참고, 내가 다 견디면 된다.” 익숙한 문장이다. 그 문장은 선의로 작동했으나, 자기 말의 부재라는 공백을 남겼다. 공백은 언제나 더 큰 목소리에 의해 점유되기 시작하고, 곧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아빠의 의견을 반복하여 딸의 목소리마저 지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자기 환대를 말하고 싶다. 거창한 게 아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 “나는 지금 이렇게 느껴”라고 주어를 자기 쪽으로 당겨오는 일이 시작점이다. 그 문장은 타인을 배척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럿의 무대를 세우기 위해 필요하다. 나의 목소리가 있어야 너의 목소리도 설 자리를 얻는다. 그때 비로소 착함은 참음의 미덕을 넘어, 관계의 질서를 세우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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