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를 나와 콜센터에서 배운 것.

콜센터에서 배운 환대의 기술

by 시몬 베유

타이슨의 유명한 말이 있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이라는 말.

나에게 이 문구가 적용된 건 다름 아닌 콜센터. 분명 인지했어야 했다. 입사 인터뷰 때 “철학 관련 전공을 나와서 설득과 이야기를 잘한다” 는 말에 시익 웃던 팀장의 미소를, 난 인지했어야 했다.

직접 상황에 투입된 지 2시간. 나는 타이슨의 말처럼 말로 쳐 맞았다.

나의 머릿속에는 그럴싸한 계획. 그러니까 학부부터 그때까지 쌓아온 말싸움의 노하우

그리고 쇼펜하우어 선생님이 알려준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 등이

그럴싸한 계획으로 준비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그건 전혀 먹히지 않았다. 나는 그걸 몰랐다.

인간은 화가 나면, 일단 말이 안 나온다는 걸.


콜센터에 전화를 걸기까지 분노와 연결까지 대기 시간이 합쳐진 인간을

난 말로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눈보라 치는 겨울에 대비되어

열이 가득 받아 전화를 걸던 손님들의 이미지였는데, 밖에서 눈을 맞으면서

전화로 나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손님을 상상해 보면

참 그 열기가 꽉 쥐고 있는 핸드폰을 넘어 눈까지 녹여버릴 것 같아

무서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나도 그 열기를 냉소나 차가움 혹은 논쟁으로 설파하려고 했지만

말했다시피 이건 ‘내’ 계획이었다. 일단 나의 입무는 빠르게 고객의 니즈를 파악해

해결방법을 제시해 주는 일이었으므로, 논쟁이란 건 애초에 불가능했으며

분노는 상대의 니즈조차 가리니 나는 열기를 식히고 원하는 바를 잘 꺼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내 말은 이렇게 바뀌었다.


“혹시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에서

“아 이런 이런 부분이 답답하셨을까요?” 로.


“아 그건 고객님 잘못이잖아요...”라는 마음의 소리는

“제가 고객님 입장이어도 불편했겠어요”목소리로.


내 책임이 아니어도 일단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고

싸워서 상대방에게 증명할 수 있어도 일단 참는 것.


내가 벼르고 벼른 내 무기가 녹아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무엇인가. 녹아버린 무기는 새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때까지 철학의 쓸모를 나를 지키고 상대를 베어내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러나 분노가 많아서 버티기 힘들어하고,

때로 상처받아 울고, 멘탈이 털리는 동료들을 보며

나는 알았다. 나도 모르게 내 용광로에서

녹아버린 철학을 상대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모양으로

바꿔내고 있었단 것을.


문학으로 단련된 이입능력과 환대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을 요약하자면 ~~~ 하다는 거죠?”

라는 요약능력. 이런 것들은 여전히 나에게 도움을 줬다.

그리고 방향, 남을 공격하고 나를 지키는 방향보다

환대하고 사랑하는 방향은 이 능력에 시너지를 내줬다.

뭐랄까. 남들보다 더 빨리 업무효율을 내거나 콜을 쳐내는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고객과 싸우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일은 남들보다 적었는데

그 이유는 ‘헤아림’ 같았다.


아무리 화난 상대라도, 일단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일.

상대가 분노해도 일단 상대 편에 서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일.

상대를 일단 내 마음에 들이는 일이 전제가 되면 상대는 화를 누그러뜨리고

자기 이야기를 편하게 하기 시작한다는 것. 물론 몇몇 나르시시스트나 공감이 결여된

이들은 그럼에도 자기 이야기를 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인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하는 이들에게 공격성이 현저히 낮았다.


나를 극한으로 지켜야 할 상황 혹은 나를 방어해야 할 상황을 제외하고는

나는 상대방들이 분노했을 때 이 사실을 떠올린다.

상대가 누구든, 경청과 환대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액션과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분노 속에서조차 연결될 수 있다는 것.


아,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가 차여 이 이야기로 마무리한다.

남편을 사주려 홈페이지에 들어가 상세설명을 읽어보았으나

제대로 나와 있지 않아 약간의 답답함에 전화를 건 아내분의 마음에 걸려

실적과 상관없이 20분 정도 내 경험과 검색을 통해 진심으로 응대해 줬을 때

참 고마워하던 그 순간. 덕분에 남편이 가고 싶었던 등산을 잘 다녀올 수 있겠다며

연신 감사하심을 말했던 순간. 무기를 녹인 대가는 일 터 속 따뜻한 기억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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