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위탁보다 욕망의 위탁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by 시몬 베유

철학, 특히 포스트모던 현대철학의 성취 중 하나는 ‘욕망’의 중요성을 꺼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부분이다. 정보의 시대에서 구조의 시대로, 구조의 시대에서 욕망과 신체의 시대로 넘어왔다는 것. 곧 ‘욕망’의 위탁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싶은 것.생각의 위탁은, 적어도 “틀렸다”는 언어로 교정이 가능하다.


논증이 붙고, 반례가 붙고, 데이터가 붙으면 생각을 ‘기분이 나빠도’ 바꾸는 사람들을 우리는 경험한다. 이 사람들은 듣고 생각을 완전히 고치거나, 아니면 자신의 생각으로 가져와 나름대로 유연하게 생각의 흐름을 바꾼다. 즉 생각의 위탁은 최소한 ‘고칠 수 있다’는 형식을 가진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 데이터나 반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례들도 있다. 열심히 그 사람과 대화를 해보려고 해도 ‘흥미는 있네요-‘하면서 바꾸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욕망의 위탁은 형식 자체가 다르다. 욕망은 생각과 행동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어딘가 메여있는 결핍은 자신을 자꾸 어딘가에 묶어두려고 한다. 생각은 동의하지만 행동은 그대로인 스스로나 타인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이 중요한 욕망을 위탁한다면 내 사고와 행동의 출발점이 타인의 욕망으로 바뀔 수 있다.


정보의 시대가 “무엇을 아는가”를 경쟁했다면, 구조의 시대는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지배했고, 지금은 “무엇을 원하게 만드는가”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 같다. 이때 가장 위험한 건, 내 생각이 아니라 내 욕망이 외주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은 반박과 반박으로 고칠 수 있는 반면, 욕망은 더 뿌리가 깊은 듯 싶다. 그러므로 생각의 위탁도 위험하지만, 더 위험한 건 욕망의 위탁아닐까?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 직면할 필요는 다름 아닌 나를 지키기 위함에서 나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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