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박식한 사내”라는 말을 들을 말이 얼마나 있을까. 갑자기 전달된 4쪽 자리 글에 담긴 표현은 “똑똑한 사람”도, “많이 배운 사내”도, 심지어 “학력이 뛰어난 것 같은 사람”이란 표현도 아닌 “박식한 사내”라는 표현이 담겨있었다. 그 표현이 눈에 띈 건 다름 아닌, 그 단어를 제외하곤 주변은 모두 세련된 언어로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박식한 사내”라는 단어가 보이자 나는 그런 장면을 떠올렸다. 최근에 찍은 선명한 영화에서 마치 박해일 씨가 90년대 영화의 톤으로 등장하는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그것보다 더 독특한 경험은 여기에 있었다. 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 이 글은 나에게 이런 부연설명을 달고 전달 됐다.
이 글은 나에게 “00님의 지분이 90% 아니 95% 가 포함됐다”며 전달된 독특한 글이었다. 당시 나는 이분과는 같이 여행을 떠났는데, 이분은 글쓰기 모임에서 내가 던진 단어가 신기해 이를 주제로 글을 썼다고 했다. 나를 주인공으로 적었다니 들뜬 마음으로 잘 건네진 봉투를 섬세히 여는 것처럼 PDF파일을 열었으나, 아쉽게도 부푼 자기만족으로 끝날 것 같았던 결과는 내 기대와는 달랐다. 신기하고 잔인할 정도로.
내가 지분이 90%인 글을 읽으며 내가 느낀 건 다름 아닌 생생하게 묘사된 작가의 감정이었다. 차분하지만 정직하게 그려낸 대화한 순간들이 나는 영상처럼 되살아나는 경험을 느꼈는데, 여행을 다녀온 지 2주 정도 지났음에도 당시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재현됐다. 강원도의 새소리, 대화할 때 생긴 정적, 다른 사람들이 중간에 끼어드는 소리들 역시 생생히 재현됐을 정도로 사실 몰입력이 강했는데, 그럼에도 살아있던 건 단연코 이분이 느낀 감정이었다. 나와의 대화에서 이분이 겪었던 긴장이나 단단함, 피로, 질문, 흥미, 호기심 등 역시 그만큼이나 더 잘 전달됐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감정이 단단했기 때문에 주변을 생생히 그릴 수 있다고 할 정도로 힘이 있었다. 그분의 필력을 따라 4쪽을 통과한 나에게 드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잘 전달받은 적이 있었나?’
나에게 회사생활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 말하기’의 장이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수평적인 회사를 다니며 나는 그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내 판단과 타인의 판단은 얼마나 다른지 발견하는 경험을 통과했다. 그러므로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경험을 통과한 한 편, 이를 통해 상대의 생각을 물어보고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잘 정리된 생각을 (비록 업무적이지만)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과정은 타인과 함께 사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줬다. 그런데, “박식한 사내”란 표현이 들어간 글을 읽으니 생각은 조금 더 굴절 됐다. 나는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 게 아니라, 타인의 ‘생각’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 거라고.
감정적 박식함이 진실되게 전달된 글을 읽으니, 내가 느낀 감정과 상대가 느낀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단번에 알아챘다. 나는 재밌다는 감정을 교류한 줄 알았는데, 이분은 호기심이 들었구나. 나는 어떤 발언을 미안하게 느꼈는데, 이분은 이걸 되려 흥미로 봤구나. 나는 어떤 발언을 진지하게 건네었는데, 이분은 거기서 재미를 찾아냈구나- 등의 미온한 교차를 발견했다. 그리고 곧, 이런 생각에 다다랐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감정을 말하는 것은 상대와 내가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우는 또 다른 방법일 수 있겠구나-라는 것을.
철학자 폴 리꾀르는 인간을 서사적 존재라고 말한다. 개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어떤 삶을 살았나요?’라고 하면 자신의 감정에 따라, 자신이 겪은 바에 따라 이야기를 구성하고 말을 꺼내는 게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현대 사회는 이 감정과 겪은 바가 점점 다양해진다는 뜻이다. 알고리즘과 사용하는 디바이스와 일하는 군집과 도메인이 모두 다르기에, 우리는 같은 한글을 쓰면서도 언어도, 감정도, 같은 걸 바라봐도 느끼는 게 다르다.
그렇게 나는 이전에 싸워왔던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그 사람의 생각뿐만 아니라 감정을 이해했다면 얼마나 많은 싸움들이 줄어나갔을까-하고. 생각과 감정을 모두 존중했다면 꽤 좋은 경험과 추억과 결과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그런 의미에서 감정을 더 정확히 쓰고, 더 정확히 듣고, 더 잘 표현하는 일은 서로 같이 살아가는 일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감정 묘사에 있어선 나보다 더 박식한 사내에게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