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두 가지 기질이 있다. 하나는 집단의 방향과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는 기질이다. 두 번째 기질은 이런 것이다. 아무튼 간, 조직이 좋은 쪽으로 가려면 누군가 희생해야 하는데, 일단 나라도 해야 한다는 기질. 그리고 이 두 기질이 만나면 신기한 현상이 벌어진다. 늘, 나는 어느 모임에 가면 내가 해야 할 최선의 행동을 찾는다. 그 방향은 다름 아닌, 모두가 최대한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드는 것.
물론 그 퀄리티는 다를지언정, 나는 늘 어느 집단을 들어가듯 흐름을 살핀다. 마치 처음 들어가는 축구팀에서 ‘아 이 팀은 아무도 수비를 하지 않으니, 나라도 수비를 해야 하는구나-‘라는 판단을 빠르게 내리고 내가 수비에 열심을 다하는 사람처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하고 그 자리를 메꾼다. 이런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면 재밌게 보이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좋은 대화는 깊이나 수준보다는 의외로 각자의 욕망에서 시작된다는 것.
절대적으로 ‘이렇다’하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내가 본 좋은 대화는 다름 아닌 들으려는 마음과 말하려는 마음이 정합을 이룰 때 재미, 감동, 교훈이 뒤따라온다는 점이다. 대화가 얼마나 깊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 대화가 얼마나 철학적인가, 얼마나 전문적인가를 다루는 가는 마냥 중요하진 않다. 아이들과 재미있고 즐거운 대화를 할 때, 우리가 나눈 주제는 종종 ‘똥’이나 ‘오줌’ 이야기, 애들끼리 투닥거렸던 이야기가 아니던가. 거기서 남는 것은 아이의 웃음과 나의 즐거움과 동시에, 아이에 대한 앎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어른들의 대화에서도 작용한다.
물론 나의 경험의 한계일 수 있지만, 모임에서 ‘철학’이 주제라고 해서 항상 생산성이 높다거나 재미있게 흘러가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사실 ‘철학’이란 주제를 매개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면, 정확히는 ‘내가 개쩐 철학을 만들었으니 들어줘-‘가 중심이라면, 서로는 서로의 이야기만 하다가 끝나고 만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혹은 들어주는 척만 하고 자기만 말하는 모임. 그 모임 속에 있으면 마냥 불쾌감만 남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가십적인 이야기를 한다거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옆집 아저씨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마냥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상대에 대한 호기심과 자기가 말하고 싶은 마음이 올곧게 리듬을 맞춰 나아간다면 서로에겐 최소한 교훈, 재미, 감동 중 하나가 남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디 대화라는 건 사실 ‘듣고 말하기’가 본질이 아니던가. 한쪽만 일방적으로 말하고 한쪽만 열심히 듣는 건 돌이켜보면 대화라기보단 강연이라던가, 타인을 둔 독백에 가까울 수 있는 것 같다.
나도 발화욕이 높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말이 적어지는 모임이 있다. 이전에는 스스로 왜 그런지를 물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만 같다. 그들의 듣고 싶은 마음을 자극할만한 주제가 나에게 없거나, 아니면 그들이 말하고 싶은 마음이 지금 사람들의 경청욕보다 크거나. 그러면 나는 좀 더 원활하게 상황이 흘러가게 끔 하기 위해 최소한 가만히 듣는 쪽을 택한다. 설령 내 이야기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가 들을 여유가 없어 보여서 말이다.
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과의 재밌고 좋은 대화를 돌아본다. 그러면 다름 아닌 경청과 발화가 적절히 섞인 대화다. 내가 책을 얼마나 읽었던, 내가 경력을 얼마나 쌓았던, 무엇을 가지고 있든 간에 나를 너무 신화화하지 않고, 반대로 상대도 너무 신화화하지 않는 그런 대화. 그러면 그것은 가벼움을 타고 무거운 쪽으로 흘렀다가도, 무거움의 급류를 타고 가볍게 끝나기도 하는 흐름을 만든다.
좋은 대화의 확실한 정답은 없겠지만, 최소한 잘 듣고 잘하는 것이 본질이 아닐까-하며 글을 마친다. 알고리즘이 자신을 좀 더 정답처럼 말하고, 상대가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당연해지는 시대에, 좋은 대화를 많이 하고 좋은 시간들이 많이 쌓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