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진

by 름 Lm

결혼식은 오후 5시 30분 시작이었다. 적어도 5분 전에는 식장에 도착해야 하객을 맞고 있는 신랑에게 양복 입은 모습을 보니 회사에서 보던 이미지랑은 또 다르시네요 인사를 건네며 꿀 같은 주말임에도 기꺼이 당신을 위해 시간을 내어 여기에 왔다는 존재감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니까 5시 12분이면 결혼식장이 있는 삼각지역에 도착해 조수석 창문을 열고 저게 식장 건물인가 봐, 대관료가 되게 비싸다더니 역시 그래 보이네 따위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야지 이태원역 해밀턴 호텔 앞 꽉 막힌 왕복 4차선 도로 위에서 꼼짝 못 하고 있으면 안 될 일이었다. 운전석의 남편에게 당장 반대편 차로로 넘어가 역주행해서 달릴 수 없는 거냐고 보챘지만 그는 평온한 얼굴로 손가락만 까딱거릴 뿐이었다. 사실 나도 마음이 급해서 그랬을 뿐, '직장 동료 결혼식 가던 신혼부부, 역주행으로 사망'이라는 타이틀로 뉴스에 나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앞 차가 움직이면 우리 차도 앞으로 조금 이동시키는 것뿐이었다. 조수석에 앉은 나도 어찌할 방도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저 남편의 오른쪽 귀에 대고 이렇게 막힐 것을 왜 진작 알지 못 했느냐고 억지 부리는 것 말고는.


설상가상으로 저 멀리서 교통경찰이 차로 하나를 라바콘으로 막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겨우 두 개뿐인 차로가 꽉 막혀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마저 막아버리다니. 우리는 아직도 이태원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그때 시각은 5시 22분이었다. 좆된 거였다. 혼자 가도 되는 결혼식에 굳이 남편까지 데려가는 바람에 축의금으로 20만 원이나 찾았는데, 신랑이든 신부든 누구에게도 눈도장을 찍지 못하면 억울해 죽을 일이었다. 자동차는 아주 조금씩만 앞으로 이동했고 그 와중에 누가 시위를 하는 건지 마이크에 대고 말하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라바콘으로 막힌 차로를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하고 있었다. 자동차가 움직일수록 마이크 목소리가 점차 또렷해졌다.


"오빠, 시위하나 봐."

"혐중 시위하는 거 아냐?"


남편은 조수석 창문 너머 그들을 언뜻 쳐다보고 말했다. "하필 지금 시위를 해." 나는 창문을 내려 일제히 걷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시위 트럭 위에서 체구가 작은 사람이 마이크를 잡고 말하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강렬한 목소리로 무언가 선언하듯 말하고 있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깃발에 뭐라 쓰여 있는지 보기 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도통 차가 움직이지 않는 탓에 사람들의 얼굴과 하늘 위로 높게 솟은 무지개 깃발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퀴어 시위인가보다, 아무튼 혐중 시위는 아니니까 한 번은 봐주자고 생각했다. 그들이 위험하지 않게 걸을 수 있도록 본래 차가 다녀야 할 길을 경찰이 친히 막아주고 있는 마당에 내가 안 봐준다고 한들 뭐가 바뀌겠냐만, 하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시위하고 있음에 인상 찌푸리지 않는 관용을 베풀었다. 거기 봉 들고 있는 여성분, 이렇게 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그리고 앞에 K5 운전자분, 바로 옆에 사람이 걷고 있으니 너무 가까이 붙지 마시죠. 조금 조심해 주세요.


행렬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의 차는 느리게 움직였지만,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는 훨씬 빨라 그들을 금방 지나칠 수 있었다. 그들을 지나치고 나니 도로가 뻥 뚫렸다. 차는 쌩쌩 달리기 시작했으나 이미 시계는 5시 31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고 생각했다. '씨발, 대차게 늦었군.'


예식장에 도착하자마자 축의 봉투에 회사명과 내 이름을 적고 축의대로 달려갔다. 식권 두 장을 받아 식장 안으로 달려가니 신부가 버진로드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어느 결혼식을 가든 아빠 손 잡고 천천히 걷는 신부를 보면 눈물이 나는 이유가 뭘까. 코끝이 찡해졌다. 하지만 신랑 측 객석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으면 곤란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 꾹 참았다. 주례는 없었다. 혼인서약서 낭독도 없었다. “앞으로는 남편이 게임해도 잔소리하지 않겠습니다.”라던가, “집안일을 잘 도와주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따위의 약속을 듣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랑 아버지가 축사하고 신부 친구가 축가를 불렀다. 신랑 신부가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는 순간에도 울지 않으려 애썼다.


뒤이어 사회자가 성혼 선언문을 낭독했다. “오늘 이 자리는 신부의 부모님에게는 새로운 아들을, 신랑의 부모님에게는 새로운 딸을 얻는 뜻깊은 자리입니다. 이에 신랑 아무개 군과 아무개 양이 오늘 이 자리에서 부부가 됨을 양가 친지와 내빈 여러분께 선언하는 바입니다.”


선언이 끝나자,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경쾌한 피아노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고 신랑 신부는 버진로드를 걸으며 세 걸음에 한 번씩 하객들에게 인사했다. 둘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예뻤다. 둘의 걸음이 버진로드 끝에 다다르자, 천장에서 꽃가루가 흩뿌려졌다. 꽃가루가 바닥에 다 떨어지기 전 둘은 짧게 입을 맞췄다. 사람들의 환호에 맞춰 나도 “호오~” 소리치면서도 직장 동료가 키스하는 장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돌렸다. 뒤를 보니 다른 하객도 박수 치며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조금 웃겼다. 이내 식의 마무리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양가 직계가족 분을 먼저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촬영하겠습니다. 연회장은 2층입니다. 식사하실 분들은 천천히 차례대로 이동해주세요. 주차는 2시간 무료입니다.”


식장에 오는 길 내내 조급해하고, 와서는 있는 힘껏 박수를 쳐서 그런지 사회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힘이 쭉 빠져 허기가 졌다. 빨리 연회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얼굴도장을 확실히 찍기 위해서는 단체 사진에 내 얼굴이 나와야 하니 양가 직계 가족, 친인척들의 사진 촬영이 끝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 했다. 단상 가운데 서서 웃으며 팔짱 끼고 있는 신랑 신부와 양옆에 줄지어 선 사람들은 바라봤다.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간 얼굴. 저들도 빨리 밥이나 먹고 싶겠지. 그런데 버진로드는 왜 버진로드일가. 내가 미카도 실크 드레스를 입고 아빠 손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을 때 나는 이미 섹스를 열 번도 넘게 한 사람이었는데. 내 남편도 그때 순결한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그리고 단상 위에서 웃고 있는 저 신랑 신부도 마찬가지일 텐데.


버진로드에 대해 한참을 생각하는 동안에도 내가 단상에 올라갈 차례는 오지 않았고 그 사이 모든 것이 점점 지루해졌다. 차라리 아까 이태원역에서 차가 멈춰 있었을 때, 그 자리에서 내려 그들과 함께 깃발을 흔들며 걷는 편이 더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롱패딩이 아니라 코트를 입고 있었고 밖은 몹시 추웠기 때문에, 내가 도로 위가 아닌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진 이 넓고 안전한 곳에 있음에 안도했다.


동시에 아주 춥거나 아주 더운 날, 내가 도로 위에서 깃발을 들고 어떤 말을 소리치며 걷는 날이 언젠가는 올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하지만 그날의 이유도, 내가 외쳐야 할 문장도 선명히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뭔지 모를 불안감과 작은 기대감만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나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뷔페 메뉴는 뭘지 생각하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공간으로 다시 정신을 되돌렸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