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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Oct 10. 2020

9. 은나라, 갑골문과 함께 전설에서 걸어 나오다.

 상(商) 나라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겼는데 마지막 수도가 은허다. 은, 상, 은상(殷商) 모두 같은 나라다. 갑골문은 3000여 년 전 은나라 문자다. 한자 변천 순서 제일 앞에 있다. 넘버 원. 고문자로 가장 늦게 1903년 유악의 철운장귀(鐵雲藏龜)가 출판되고서야 찾은 자리다.

 베일 속 갑골문의 첫 발견자는 왕의영이다. 1899년 그가 학질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갑골문은 약탕기에서 곰탕이 되었거나 가루약이 되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의 학질 치료 처방전에 있던, 당시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되었던 용골이라는 뼛조각에서 문자를 찾아냈다. 청나라 국립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 제주였던 왕의영은 서예와 금석문에 정통했고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런 남다름이 있었으니 그 가치의 발견이 가능했을지도. 내 눈에 띄었더라면 고민 없이 곰탕으로. 그러나 안타깝게도 갑골문 발견 1년 뒤 청나라가 일본과 모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자 투신하여 절명했다. 그의 연구는 친구 유악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갑골문은 점을 친 내용의 기록이다. 복사(卜辭)다. 순서를 보자. 신(神)에게 질문할 내용을 귀갑 수골(龜甲獸骨:거북의 등딱지와 짐승의 뼈)에 쓴다. 쓴 갑골에 열을 가한다. 가열 후 나타난 균열을 보고 왕이 해석한다. 해석한 내용을 갑골에 새긴다. 신의 뜻을 해석할 권한은 왕에게만 있었다. 신탁, 그들만의 이야기다. 특정 집단이 전담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깔끔하게 줄 맞춰 기록할 이유가 없다. 깨알같이 작게 삐뚤삐뚤, 이리저리 써 놓아도 불친절한 글이 아니다. 그들만의 소통이니.

 내 경우는 다르다. 순서는 이렇다. 몇 달의 장고(長考)에 돌입한다. 생각을 끝내고 소위 메이커 물건을 산다. 상표는 잘 보여야 한다. 작으면 안 된다. 되도록 크게. 다른 사람들이 잘 보이게. 훌륭한 배려다. 그렇지만 어디서 들었는데 좀 입는 사람들은 상표를 드러내지 않는단다. 그들만 알면 된단다. 소통의 대상이 다르다. 어쩐지 갑골 문자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의문의 일패다.

써야 할 붓글씨는 안 쓰고 수채화로 그렸다. 수채화도 초보다.


 갑골문과 비슷한 시기에 풍미했던 이집트 상형문자, 마야 문자,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는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갑골문은 필획과 배열 방식, 공간 구성 등 한자의 골격으로 이어져 왔다. 3000년이나. 한자의 1번 타자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청동기시대라 새김 도구가 날카롭고 예리하여도 쇠만큼은 못하였을 것이다. 연장의 한계로 곡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한자의 획에 동그라미가 없는 이유를 갑골에서 찾는 주장도 있다.

 한편 갑골문 중 도기 위에 붓을 사용해 그림문자를 쓴 것도 있다던데. 붓은 동그라미가 잘 그려지는데. 뭐 분분한 학설은 학계를 움직이는 일상이니. 어찌 되었든 갑골문자의 발견 덕분에 한자의 가장 오랜 전형을 만날 수 있었고 점복(占卜)으로 신과 함께했던 전설의 은나라를 현실로 복귀시켰으며 그 시대 정치, 사회, 경제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갑골문은 고대 문자라는 위상에 걸맞은 난제도 남겼다. 해독의 문제다. 점복의 기록이니 오죽하랴. 현재 10만 개가 넘는 갑골 조각에서 해독된 글자는 약 1800개 정도다. 그래도 다행히 갑골문과 동시대에 사용되어 주나라로 이어진 금문 또는 종정문이라는 해독의 키워드가 있다.   

 갑골문자 라인의 상형문자 중에 물체 형상이 내 생각과 차이 나는 글자가 가끔 있다. 마치 별자리 형태 설명처럼. 오리온 별자리가 오리온이 방패를 든 모양이라 했다. 아닌데. 그래도 나는 애매모호하게 동의한다. 게다가 그 사냥꾼이 무릎을 꿇었다는 대목에서는 고개마저 끄덕여주는 나를 보며 내가 인도주의자며 평화주의자였음을 알게 된다. 글자의 기준은 기록자의 눈일까? 그래서 한자를 창제한 창힐의 눈이 넷 또는 그 이상으로 더 많았다는 것인지도.      

 

 초보자는 궁금한 것이 많다. 갑골문도 임서(臨書 : 학습할 글씨를 그대로 보고 쓰는 것)를 할까? 갑골문은 붓으로 쓴 것이 아니고 연장으로 새긴 것이라서 든 생각이다. 임서는 못하겠네! 확실히 서각(書刻 : 글씨나 그림을 나무나 여러 재료에 도구를 이용해 새기는 것)의 대상이네. 그들만의 문자겠네! 이 질서 없이 불편한 갑골문은 나와 상관없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찾아봤다. 그런데 쓰는 사람이 있다! 갑골문도 임서를. 배움에는 끝이 없다.

갑골문은 돋보기로 보아야 할 만큼 작은 글씨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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