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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Sep 22. 2020

1. 병풍의 다이어트 시작

 제사의 무게는 무~겁~다. 음식 준비도 힘들지만 주변을 압도할 크기의 병풍은 보기만 해도 걱정거리다. 저 덩치는 보관, 이동, 설치 다 장난 아니다. 나름 선방했던 체력전에서도 저 덩치와 무게에 점점 밀리고 있다. 돌파구를 찾기 위한 시도가 병풍의 다이어트였다. 가벼운 블라인드로! 관습에 도전하는 것 같지만 공생 차원의 지혜가 필요했다. 블라인드에 붓글씨로 직접 글을 쓰면 어떨까? 좋네. 그래 결심했어! 그래서 서예를 배우기로 했다. 딱하게도 첩첩산중을 금상첨화로 보는 무서운 안목을 덤으로 지녔으니. 무식하여 용감한 자의 배는 위풍당당하게 깊고 높은 산을 향해 가게 되었다. 

     

 문외한으로 무작정 달려들어 사정없이 깨지고 싶지 않았다. 대략 일 년 정도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전투의 더 빠른 승리를 위한 비책이 필요했다. 자타공인, 행동은 느리나 잔머리는 거의 빛의 속도를 가진 자는 뭔지도 모르지만 사전작업을 준비했다. 참으로 근거 없는 패기가 차고 넘친다.     


무적의 레시피를 만들기 위해 연표, 서예 이론서, 필기구, 노트북, 노트를 준비했다. 

중국 시대별 특징과 서예가들을 중심으로 낱낱이 정리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려움을 예상은 했지만 난리가 풍년이 들었다. 한자의 방대함은 인내의 용량을 훌쩍 넘었고, 등장했다가 사라진 수많은 나라들 때문에 기가 찼다. 서예도구, 서체, 서예가, 용어... 살짝 닿기만 해도 기다렸다는 듯 끝도 없이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들도 몰랐겠지만, 수많은 서예가들은 시공을 넘어 스승과 제자의 라인을 만들어놨고 읽기도 어려운 용어들은 줄을 섰다. 글을 쉽게 쓰려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 점점 산으로 올라가게 될 줄이야.     

  

 의욕만 가득한 자, 시작하자마자 항복! 정리 불가능. 일부 책에는 아군이어야 할 전공자들의 박식하고 심오하며 친절한 설명이 오히려 초보자를 오리무중으로 이끌었다. 읽은 자리를 자꾸만 맴돌았다. 너무 깊고, 넓고, 힘들고, 봐도 모르겠고. 그래서 펼쳤다가 덮었다가를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이쯤 누군가 혜성처럼 나타나 그만하라고 말려줘야 했다. 근데 이 은근한 병풍 다이어트 작전이 노출되기 전이라 아무도 몰랐다. 쓸데없는 비밀이 완벽하게 보장되고 있었다. 병풍을 다이어트 시키려고 시작하는 서예가 길고 외로운 길이 될 것이라는 것을 이때라도 눈치챘어야 했다.        


정리 방법을 대폭 수정. 넓고 깊은 바다 쪽은 아예 눈길도 주지 말고 작고 얕은 실개천에 잠시 발끝만 담그는 수준으로 얼렁뚱땅 내용을 정리했다. 호기로 가득했던 결심은 사라지고 아주 얇은 레시피가 달랑 손에 남았다. 나의 잔머리가 만든 함정에서 겨우 빠져나왔다. 

별로 남는 것이 없는 공부지만 끝을 냈으니 다음 단계인 서예도구를 만나보자. 이제 조금만 있으면 멋진 글을 쓸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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