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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령 Nov 15. 2021

11. 진시황, 문자를 향한 뜨거움과 차가움

1. 황제의 등장

 중국 전설 속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었는데 그중 황제(黃帝)의 사관 “창힐”이 한자를 만들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황제(皇帝) 시대를 연 진시황이 등장했다. 황제의 재상 이사는 전서를 정리해 문자를 통일하고 이 문자로 “창힐”이라는 책을 지었다.

 

문자를 둘러싼 다른 시간 속의 황제와 창힐의 조합이 이채롭다.


2. 불로초를 찾아서

 황제는 왕들의 왕이 아니다. 인간을 초월한 상위의 개념이다. 인간과 차원이 다른 황제로서 진시황은 불사의 몸을 가져야 했다.

반드시 불로초가 필요했다. 신선이 사는 곳에 있다는 불로초를 찾다가 우리나라 남해까지도 왔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불로초를 구할 수 없었다. 그는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순행 중 약물중독으로 길 위에서 죽음을 맞았다.  

    

여기서 잠깐! 백제의 금동대향로는 신선이 사는 삼신산 모양의 박산향로 중 백미로 꼽는다. 향로의 모양을 잘 기억해두시길. 혹시 바다 위 박산향로 모양으로 솟은 산을 보게 된다면 신선과의 조우를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분들에게서 불로초 얻게 된다면 우리 함께해요.    

국립중앙박물관, 백제 금동대향로. 흔들렸지만 이 사진이 없었으면 초보 그림실력으로? 보시는 분들 어쩔 뻔~


3. 문자의 통일, 그 배후

 문자는 권력이라 했다. 500년을 넘은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통일을 이룬 진나라는 넓은 지역을 다스릴 강력한 체제와 수단이 필요했다. 지역별 다른 문자는 통치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었다.


전서를 대전과 소전으로 구분하는데, 춘추전국시대 각국에서 사용된 여러 모양의 대전을 진나라에서 사용한 소전을 중심으로 정리하고 간략화하여 문자를 통일했다.  

    

 통일 후 학자를 생매장하고 서적을 불태웠다는 분서갱유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났다. 분서는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서적이 대상이었다. 다음 해 불로초로 촉발되어 갱유 사건이 일어났다. 두 사건은 발생 원인과 시간이 다름에도 하나로 묶인 것은 진시황의 강력한 통치 스타일 때문이리라.

그의 업적과 동시에 실정이 된 대규모 공사의 수혜자는 그가 아니었다. 많은 희생을 치르며 얻은 수확을 거둬들이기엔 그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황제임에도.

     

4. 문자 통일이 남긴 족적

글자와 그림의 근본은 같아서 서예와 회화의 기법이 다르지 않다. 그림문자 그룹인 갑골문자, 금문, 대전은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다. 문자는 소전으로 통일되면서 일정한 크기의 사각형으로 형태가 잡혔다.


이제 글자는 그림과 다른 행보를 시작한다. 소전은 그림의 그늘인 상형의 회화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추상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전서는 짧은 진나라의 수명처럼 지금은 의례와 장식적 용도로만 명맥을 잇고 있다. 그나마 뛰어난 조형성을 바탕으로 비석, 도장 등 전각으로 버티고 있지만 이미 도장이 그러하듯 수요의 감소 앞에 전서의 운명도 앞선 글자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한 글자의 형태를 지닌 소전은 문자학 연구의 기본적인 자형으로서 존재감은 중요하다.

그러고 싶지 않겠지만 혹시  보게 된다면 이 글은 천자문 일부입니다

 세로로 긴 사각형의 좌우대칭인 글씨는 사실 보기와 달리 쓰기가 쉽지 않다.

기교를 부리지 않은 담백한 글씨지만 균제미를 살리려면 공이 많이 들어간다. 모나지 않게 원필로 시작해서 곡선과 대칭에 집중하면서 굵기를 균일하게 쓰려니 힘들다. 자꾸 삐뚤어진다. 내 삐딱한 성격이 막 나온다.


그런데 쓰기 편한 서체의 출현을 모두가 기대했나 보다. 새 시대, 한나라의 새로운 글자가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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