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더라도 돌아가니까 빠르고 오래가더라구요
석사 졸업 후 12년만에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다.
학문적 기초가 약한데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하면서 자취살림과 학업을 하려니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어 써야 했다. 친목을 위한 개인적, 공적 모임도 모두 끊었다. 공부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박사 마지막 학기가 되었고, 연구실에는 갓 입학한 20대 초중반의 석사생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까지 연구실 내에서 과자 비닐 소리 내는 것 조차 조심스러웠던 조용한 연구실 분위기를 완전히 시장, 그리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바꾸어 놓았다.
연구실에서 연구와 학업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면 이해할 수 있었는데, 이제까지 만나온 이성친구들의 연혁과 전국의 맛집 포트폴리오를 그때의 생생한 감정을 섞어 구두로 나열하고 있는 것을 보니 참으로 한심했고, 기본적인 개념이 없다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특히 코로나로 수업이 원격으로 진행되다 보니, 당시 수업조교로서 역할을 연구실에서 내에서 할 수 밖에 없는 나로서는, 옆에서 과거의 이성친구와 스킨십했다는 얘기가 마이크로 들어가 학생들의 학업에 방해되는 것이 아닐까 무척 신경이 쓰였다.
“야! 너네들이 개념이 있는 애들이니? 연구실에서는 연구를 해야지! 좀 조용히 좀 해”
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 후로 불어 닥칠 연구실 내 냉랭한 분위기와 나에게 쏟아질 도끼눈을 감당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얘들아, 미안한데, 나 지금 수업 중이니까 조금만 조용히 해 줄 수 없을까?” 라는 얘기라도 수도 없이 말하고 싶었지만 이조차 하지 못했다. 내 이야기에 이 친구들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실리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얘기를 할 바엔 안 하는게 낫다는 것 정도는 지난 날 경험을 통해 알았으므로, 내가 이러한 이야기를 해도 상대가 불편하지 않을 만큼 내가 상대를 사랑하고, 상대가 그 사랑을 느끼는 것이 먼저라생각했다.
‘난 곧 졸업해야 해. 그래서 나 지금 무지 바쁘거든. 그러니까 나는 너희들이랑 얘기할 시간 없어.’란 생각의 바탕에는 이들의 고귀함보다 내 일을 더 중시하는 생각이 들어 있으므로 그들이 기분 좋을리 없었다.
그래서 더 관심 갖고, 동료로서 진심으로 다가가고자 했다. 어떨 때는 정말 관심 없고,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는 얘기를 무한히 들어줬다. 시간이 아깝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2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계속될수록 급속하게 친해졌다.
친해지면 내가 연구에 집중하도록 배려해주겠지 생각했는데, 그 반대였다. 내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으니 집중을 한참 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 스티커 살까요? 이 색깔 예뻐요?’ 등 변변 찮은 이슈로 내게 질문하며 나의 집중을 번번히 깨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고민이 있다며 얘기하길래 들어주다가, 어렵게 준비한 나의 오전 시간이 모조리 달아나기도 했다.
‘나 이제 공부하면 안될까?’라는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의 부탁에 부정적인 감정이 없을거라는 걸 장담할 수 없었기에 그런 생각을 꾹 눌러담았다.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집중을 그녀의 이야기에 모으려 노력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 내 연구에 집중할 때쯤, 툭툭툭툭 덜덜덜덜… 어디에서 나는 무슨 소리인가 뒤돌아 봤더니 그녀가 다리를 떠는 소리였다. 정말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아직 내 마음에는 사랑만 담겨있지 않으니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내가 할 것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하루는 원고마감이 다가와 정말 급하게 원고를 줘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오늘도 기분 좋게 나에게 다가오며 일상의 시시콜콜한 질문을 계속해서 집중이 곧잘 끊어지게 했다. 그래서 내가 부탁했다. 아마 애원으로 들렸을지도 모른다.
“OO야, 나 이거 오늘 오후 3시까지 제출해야 해서 진짜 바쁜데, 나 좀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사실 실수를 줄일 수 있도록 스크립트를 메모장에 적고 되뇌이며 연습했었지만, 부정적인 감정이 들어있을 까 봐 자신이 없어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다행히 내가 그녀에게 이 말을 한 순간, 나의 마음에는 전혀 부정적인 것이 없었으므로 그녀 또한 어떤 부정적인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다. 애원이 섞인 내 말을 듣은 그녀는, 또렷한 눈으로 나를 보더니 비장한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면 내가 집중하도록 내버려두고 있는 것이 나를 돕는 것임을, 그녀의 사랑을 표현하는 길임을 알아차린 듯 했다.
그리고 그 후로 수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녀는 내가 집중하고 있는 게 보이면 말을 걸지 않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다른 학생들에게도 그렇게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모이면 다가가지 않았다.
사람들을 배려하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연구에 집중력이 높아진 그녀를 보면 기쁘다.
내 안에서 습관적으로 바로 떠오르는 말들, 내가 그동안 많이 들어었던 말들을 그녀에게 그대로 전했으면 어땠을까? 그녀에게나 나에게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 차,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만을 느끼고, 사랑만이 표현된다면, 그 사랑은 나를 강하게 하면서도 겸손하게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같이 있는 사람도 기분좋게 하며 완전하게 하게 힘을 샘솟게 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