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나는 약 20년 가까이 노래를 가르치는 보컬선생님이다. 예고예대반, 오디션반, 취미반, 전문반까지 다양한 과정을 가르치면서 가장 많이 만난 연령대는 바로 청소년이다.
유행에 예민하고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에 해마다 인기 레슨곡도 어떤 연령층 보다 빠르게 변화한다. 내가 노래를 찾아 듣지 않아도 레슨을 통해 웬만한 인기 차트곡들은 추려낼 수 있다. 제대로 들은 적도 없는데 부를 수도 있다. 가끔 오디션 준비생들을 가르칠 때는 음악뿐만 아니라 영상까지 반복해 시청하다 보니 춤까지 터득할 만큼 학생들의 레슨곡은 나에게 큰 영향을 준다.
수많은 레슨 곡들 중에서 발매된 시간이 꽤 지났어도 꾸준하게 학생들이 가지고 오는 노래들이 있다. 그중 기억에 남는 곡이 있다면 볼빨간사춘기의 <나의 사춘기에게> 이다.
기억에 남았던 이유를 묻는다면 보통은 ’인상 깊어서‘, ’감동적이어서’ 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곡은 오히려 반대이다. 이 노래의 가사말은 직접적인 편이라 해석적인 면에서 어렵거나 노래 부를 때 이입하고 표현함에 있어 크게 어려운 곡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았고 매번 무미건조하게 지나쳤다. 내가 이입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한 번쯤은 제대로 이입해보고 싶은 호기심에 가사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노래가 담긴 볼빨간사춘기 앨범 ‘Red Diary’ 에는 총 6곡이 담겨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온 사춘기 시절의 감정들을 담았다. 그리고 대부분 썸, 사랑, 이별을 겪는 시기의 감정을 담아냈다면 유일하게 ’성장통‘에 아파하는 사춘기 시절의 아픔을 담아낸 곡이 바로 <나의 사춘기에게> 이다. 첫 번째 타이틀 곡 ‘썸 탈거야‘ 만큼 큰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가 되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곡을 가지고 오는 학생들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졌다. ‘요즘 무슨 일 있니?’
대부분은 ’노래가 좋아서요’, ‘가사가 좋아서요‘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고 무심하게 던진 이 한마디가 몇 학생들에게는 눈물버튼이 되곤 했다. 특히 청소년기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입시 제자들을 첫 줄에서부터 울컥하게 만드는 곡이었다. 대학이라는 압박과 동시에 공부과 음악을 병행해 내야 한다는 무거운 짐 때문일까.
나는 한때 내가 이 세상에 사라지길 바랬어
온 세상이 너무나 캄캄해 매일 밤을 울던 날
차라리 내가 사라지면 마음이 편할까
모두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나 두려워
아름답게 아름답던 그 시절을 난 아파서
사랑받을 수 없었던 내가 너무나 싫어서
엄마는 아빠는 다 나만 바라보는데
내 마음은 그런 게 아닌데 자꾸만 멀어만 가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노래의 시작은 사춘기 시절의 환경과 감정을 다루고 있다. 이 노래를 선곡해 온 학생들은 본인의 현재 상황에 빠른 속도로 이입해 불러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기승전결 흐름에 대한 틀을 깨고 첫 줄을 시작으로 1절에서 완벽한 감정을 담아냈다.
나는 그때마다 위로와 응원의 말을 해주며 입시 선생님의 본분인 멘탈 관리에 힘을 쏟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 또한 이 노래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싶어졌다. 지금은 ‘그땐 그랬지~‘ 하는 해소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 번쯤은 그때의 나를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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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춘기는 어땠는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춘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기는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일 것이다. 친구들을 잘 만난 덕일까? 다행히도 나름 평범하게 지냈다. 오히려 성인이 된 이후 찾아온 사춘기 덕에 내 인생의 곡선은 물결처럼 예쁘게 그려졌다.
이 노래를 들으니 제2의 사춘기였던 나의 ‘30대’ 초반 시절이 떠올랐다. 분명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나이를 먹었고 사회적 경력도 많이 쌓였지만 그에 비해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고 이뤄낸 것도 딱히 내세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찾아온 무기력함과 우울함은 점점 커져갔다.
10대는 마냥 순수했고 20대는 그저 즐거웠다. 다양한 힘듬도 이겨낼 에너지가 있었고 용기 또한 가득했다. 30대는 달랐다. 내 인생에 대한 책임감이 커지면서 삶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는 생겼지만 동시에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여전히 높아졌다. 이러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결국 터졌을 때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은 어리석게도 부모님에 대한 원망하는 마음이었다. 나쁜 마음과 착한 마음은 매일 요동치며 싸웠고 딱히 취미생활이 없던 나는 풀 곳도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일탈은 우습지만 ‘드라이브’ 였다.
프리랜서의 장점인 스케줄 조정을 통해 매주 월요일을 휴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장롱 면허였던 나는 운전 연수를 등록하고 내 차는 없지만 대여 어플을 이용해 연수가 끝나자마자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나만의 ‘쏘카데이’를 만들어 근교 바다를 보러 가거나 대형 카페 투어를 다니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 나의 가장 왕성했던 30대 사춘기 여정들을 한참 들여다보고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선택했다. 이 노래에서 ‘그때의 나’로 돌아가 공감할 것인지, ‘지금의 나’의 시점에서 그 시절의 나를 바라볼 것인지. 내 선택은 후자였다. 가사도 2절이 지난 가장 마지막 부분에서 내 마음이 움직였다.
그래도 난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 밝은 빛이라도 될까 봐
어쩌면 그 모든 아픔을 내딛고서라도
짧게 빛을 내볼까 봐
포기할 수가 없어
하루도 맘 편히 잠들 수가 없던 내가
이렇게라도 일어서 보려고 하면 내가 날 찾아줄까 봐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바랬을까
그때의 나를 지금 바라보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무척이나 용감했고 어떠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잘하고 싶고 잘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 답답하지만 절실함에 눈물이 나고 마음이 힘들었던 것 같다.
나는 이전에 이 노래를 대했던 내 모습이 바로 ’회피‘ 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때는 ‘힘들다’, ’어떡해‘, ’울고 싶다‘ 와 같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싫었고 그래서 레슨 시간 이외에는 감상 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이 노래를 그때의 나로 돌아가 이입하라면 외면할 것 같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때의 나를 바라보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가사에 이입하는 ‘시점‘에 따라 노래는 차가워질 수도 있고 뜨거워질 수도 있다. 어려운 내용이나 가사가 아님에도 공감되지 않거나 불편한 마음이 든다면 플레이리스트에서 지워버리자. 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면 이전의 나와 이후의 상황은 분명 달라져 있을 테니 시점의 변화를 두고 감상해 보자.
노래는 가사와 멜로디가 만나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같은 노래를 들어도 듣는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 모두 다르다.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다. 앞으로도 들을 노래가 여전히 많다는 점, 또 어떠한 노래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나를 마주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