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집은 짓지 못해도, 옷은 못 지어 입어도, 밥은 지어먹는다.
오늘은 보리밥을 먹기로 했다.
쌀과 납작보리를 한 컵씩 스텐 보울에 담고 물을 담는다.
첫 물은 재빠르게 쌀과 보리를 헹궈내고 얼른 버린다. 두 번째 물을 받아 쌀과 보리를 손으로 훑듯이 문질러 씻는다. 물속에서 제각각, 또는 물살의 흐름에 따라 함께 흔들리는 낱알들의 촉감이 기분 좋다. 쌀뜨물이 뽀얗게 올라오면 다른 통에 조심히 따라둔다. 멸치, 다시마, 야채 자투리를 넣고 진하게 우려 둔 육수와 함께 청국장 국물이 되어 줄 것이다.
점점 맑아지는 세 번째, 네 번째 헹굼물 속에서 쌀과 보리가 뽀얗다. 물 양을 맞춘 다음 압력솥에 우르르 부어버린다. 보울에 남은 몇 개의 낱알들도 쓸어 솥에 넣는다. 섬처럼 솟아 물 밖으로 나온 쌀과 보리의 더미를 손등으로 고르게 정리해 물속에 잠재운다. 이삼십 분 즈음 지난 뒤에 보면 낱알들이 물을 머금어 통통하다.
압력솥 뚜껑을 닫고, 불을 세게 올린다. 증기 구멍으로 김이 폴폴 오르다가 김이 오르지 않으면 압력이 걸린 것이니 불을 살짝 줄인다. 뚜껑의 압력추가 점점 올라가다 가장 높은 눈금이 보이면 불을 끈다. 가지볶음과 청국장찌개가 완성되는 동안 밥에 뜸이 들고 솥의 압력이 낮아진다. 반찬과 찌개를 완성하고 상에 올린 후 밥솥의 레버를 밀면 약하게 남아있던 압력이 '슉-' 하고 풀리며 뚜껑의 결합이 느슨해진다.
밥솥을 열면 쫀득하게 익어 고르게 누운 밥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주방에 스탠드 믹서와 블랜더, 주물냄비 등이 들어오느라 공간이 부족해지기도 한 데다가, 한번 압력솥(전기압력밥솥이 아닌)으로 짓는 밥에 맛을 들이니 전기밥솥의 코드를 한 달에 두세 번도 꽂지 않게 되었다.
전기밥솥에 한 밥이 아무래도 찰기가 떨어지다 보니 볶음밥용 밥을 지어야 할 때나, 식혜를 할 때 정도가 전기밥솥이 일을 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과감히 전기밥솥을 치우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을 수납하기로 했다.
어차피 잘 쓰지도 않던 것인데도 전기밥솥을 주방에서 치우는 일은 어떤 큰 사건처럼 느껴졌다.
매 끼니 압력솥에 밥을 짓는 사람이라니. 어쩐지 좀 더 멋진, 프로 살림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압력솥에 밥을 한다는 게 전기밥솥에 하는 것보다 아주 큰 수고를 들이는 일이 아닌데도 그렇다.
압력솥에 밥을 하는 행위는 뭐랄까, 밥을 '짓다'라는 동사에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든다.
쌀을 안치고 버튼을 꾹 누르는 게 아니라, 적당한 세기로 불을 조절하는 일.
'백미 취사가 완료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내 눈으로, 귀로, 가끔은 코로 밥이 잘 되고 있는지,
이만하면 밥이 다 되었을 것인지를 살피는 일. 그런 것들이 좋다.
짓다, 라는 말이 어디에 쓰이는가 생각하다 찾아보니 밥, 옷, 집을 짓는다,라고 할 때 쓰인단다.
옷을 만든다, 집을 만든다 하면 재료들을 조합해 만들어지는 '공정'들이 떠오르지만
옷을 짓는다, 집을 짓는다 하면 몸의 길이를 재고 소재를 고르는 손길과 뜨개질, 바느질하는 손이 그려진다.
필요한 공간을 그려보고, 터를 정하고 기초를 다듬고, 자재를 고르고 골라 완성되는 집의 모습이 연상된다.
짓는 일은 그냥 '만드는' 것과는 다르다.
약을 짓다,라고 할 때도 쓰인다. 증상에 따라 필요한 재료를 조합하고 구성해 약을 만든다는 느낌이다.
그냥 약을 사는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시를 짓다, 노래를 짓다, 이야기를 짓다 라고 할 때도 쓰인다. 짓는다는 것은 창작이기도 하다.
밥은 지어지는 것들 중에서 가장 쉽게 지을 수 있는 것. 하지만 그래서, 매일 할 수 있어서 가장 좋은 것.
내 살 집을 짓지는 못해도, 내 옷을 지어 입지는 못해도 매일 나와 내 남편이 먹는 밥을 짓는다.
언젠가 집도 지어보고 옷도 지어 입으며, 매일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 부르는 삶을 살면 참 좋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해 우선 밥부터 매일 지어본다.
오늘도 밥을 지으며, 솥을 열어 뜨거운 김이 오르는 밥을 저으며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무엇을 지었고, 또 무엇이 나를 지어내고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