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녀미 Jul 30. 2020

깨를 볶는 밤

잡다하고 사소한 집안일들은 언제나 나를 기다린다

오후에 운동을 하고 돌아와 저녁 준비를 했다. 메뉴가 간단하니 할 일이 많지도 않았지만 모처럼 테이블에는 꽃이 있고, 와인을 열고 잔을 준비하는 남편을 보니 뭔가 하나라도 더 올려야 할 것 같아 마음은 급했다. 

늘 그렇듯 평범하고 특별한 한 끼, 그런 하루가 또 흘러간다. 더없이 소중한 시간인데 왠지 자꾸 잠이 오고, 배가 채 꺼지기도 전에 나는 침대에 들어가 누웠다. 우선 살짝 졸아보고 생각해야지. 더 잘지, 말지를. 팟캐스트 소리가 들렸다가 희미해졌다를 반복하고 다시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더 자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고양이들과 남편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시간은 열한 시. 내가 좋아하는 밤의 시간, 다행히도 멀쩡한 정신. 자잘한 주방 일을 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얼른 먹어야 할 호박을 다듬어 채반에 널어두고, 냉장고 속 야채를 정리하고, 육수를 내고, 깨를 볶았다. 

원래는 피클을 만들어 두려 했는데 한인마트에서 비싸게 주고 산 한국 오이를 고작 피클 만드는 일에 쓰기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근처 마트에 가서 오이와 고추를 넉넉히 사 피클과 양파장아찌를 함께 담는 걸로 하고 다른 일을 찾았다. 


대신 내일의 저녁 준비를 줄이기 위해 육수를 끓였다. 다듬고 남은 야채 자투리와 껍질, 며칠 전 오븐에 구워 말려둔 새우껍질, 말려 냉동실에 넣어뒀던 파뿌리와 무 껍질과 다시마를 넣고, 얼마 남지 않은 멸치와 디포리도 스텐 팬에 덖어 내장을 떼어낸 후 물에 함께 넣어 끓였다. 야채가 싸고 흔한 곳이긴 하지만 육수에 맘껏 풍덩풍덩 넣기엔 아직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이렇게 자투리 야채를 말려두니 어렵지 않게 진한 육수를 낼 수 있어 정말 마음이 즐겁다. 말 그대로 '알뜰살뜰' 살림하는 기분이 난다고나 할까. 


육수가 끓는 동안 벽장에서 참깨가 담긴 병을 꺼내왔다. 벽장을 연 김에 통후추도 찾아 후추 그라인더에 넉넉히 담았다. 우리 집은 후추를 많이 쓰는 편이라, 지난번 코스트코에서 대용량 후추를 두 번 연속으로 구매하는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그 걸 거의 다 사용해가고 있다. 뭐든 많이 사 두는 습관을 버리고 싶은데, 무엇이든 넉넉히 있는 벽장을 보면 마음이 든든해진다. 


한국 집에서도 참깨를 볶아서 먹진 않았는데, 미국에 오니 볶아진 참깨와 안 볶인 참깨 가격 차이가 상당해서 어쩔 수가 없다. 볶인 참깨를 사서 음식에 소심하게 뿌리느니, 참깨를 씻고 볶는 수고를 감내하고서 음식에 넉넉히 뿌리고 싶은 마음이다. 언젠가 경제적으로 더 많이 풍족해지면 볶은 참깨를 사게 되는 날이 올까 생각해 보았지만 아마 그때에도 나는 볶지 않은 참깨를 살 것이다. 대신 한국산 유기농 참깨를 사서 또 열심히 볶겠지.


물에 한번 씻겨 건져진 참깨를 살짝 달궈진 웍에 넣고 수분을 날리며 볶는다. 주걱에 잔뜩 달라붙던 깨가 서서히 마르며 떨어지고, 토르르 토르르 웍 안을 구른다. 희고 납작하던 깨는 진한 베이지 색으로 변하며 통통해진다. 이따금씩 톡 톡 튀어 오르기도 한다. 손으로 눌러보며 쉽게 바스러지며 고소한 향을 풍긴다. 내일은 감자를 볶고 깨를 평소보다 넉넉히 뿌려야겠다. 한 번쯤 날이 더워지면 빨간 양념장을 얹고 깨를 와르르 부은 쫄면도 먹어야지. 진하게 우러난 육수와, 고소하게 볶여 식어가는 깨의 냄새를 맡으며 맛있는 것들을 생각하니 벌써 배가 고프다. 내일 첫 끼를 먹으려면 아직도 열한 시간이나 남았는데. 



매거진의 이전글 밥 짓는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