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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녀미 Dec 20. 2019

캠핑을 좋아한다

나도 내가 이런 걸 이렇게나 좋아하게 될 줄 몰랐다.

'편한 집을 놔두고 왜 밖에서 자려고 이 고생을 할까?' 하며 짐을 싸는 순간을 좋아한다. 

트렁크와 뒷좌석을 꽉꽉 채운 포포를 타고 익숙한 도로를 달려 낯선 곳으로 향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캠프그라운드에 도착했을 때의 막막함을, 그리고 짐을 풀기 전 마시는 한 캔의 맥주를 좋아한다. 

통신의 단절이 주는 강제적인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타프를 치기 위해 오른 나무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망치가 팩을 두드릴 때의 그 경쾌한 리듬을 좋아한다. 

분 단위로 변하는 하늘의 색과 지는 해를 넋 놓고 바라보고 나면 순식간에 찾아오는 어둠을 좋아한다. 

어릴 때에는 꿈도 못 꾸던 비싼 망원경을 조립하고 혼자 감탄하는 일을 좋아한다. 

고개를 들면 보이는 검은 하늘을 빽빽이 채운 별들을, 그리고 그 사이에 자리한 관측 대상들을 좋아한다. 

추위에 뻣뻣해진 몸을 데워주는 차 한잔과 라면 한 그릇을 좋아한다. 

밤의 고요를 깨는 기차 소리, 풀벌레 소리, 동물 발자국 소리를 좋아한다.  

하늘이 밝아올 즈음 피로감과 행복에 젖은 채로 들어선 텐트 안의 아늑함을 좋아한다. 

옷을 접어 만든 베개를 베고 포근한 침낭 안에서 달게 잠드는 순간을 좋아한다. 

아침 햇살에 덥혀진 밝은 텐트 안에서 침낭을 벗어던지고 자는 아침잠을 좋아한다. 

부은 얼굴과 엉킨 전봉준 머리를 하고 텐트 밖으로 나왔을 때의 시원한 공기와 여전히 낯설지만 약간은 익숙해진 풍경을 좋아한다. 

도구와 재료의 한계를 안고 전투적으로 요리하기를 좋아한다. 

햇빛과 그늘의 경계에 걸쳐 앉아서 책을 보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을 좋아한다. 

꼬질꼬질한 손과 발을 물티슈로 대충 닦은 뒤의 상쾌함을 좋아한다. 

가뜩이나 어수선한 테이블에 돌과 풀과 나무 열매 따위를 늘어놓는 일을 좋아한다. 

모카포트를 두고 온 걸 알았을 때의 허탈함과 원두 가루를 직접 끓여 먹는 이상한 커피도 좋아한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 휴지가 휘날리고 비행접시가 날아다니고 타프가 흩날리고 

의자가 쓰러지는 순간마저도 좋아한다. 

캠프를 정리하고 며칠간 우리가 지낸 공간이 다시 텅 비어버린 모습을 볼 때의 아쉬움을 좋아한다. 

먼지를 뒤집어쓴 짐들을 먼지를 뒤집어쓴 포포에 싣고 먼 길을 달려 다시 돌아온 우리 동네를 좋아한다. 

집에 들어섰을 때 우리가 너무 반가운 고양이들의 도도한 치근거림을 좋아한다. 

산더미 같은 짐들을 정리하기 전의 한숨과, 정리한 뒤의 후련함을 좋아한다.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는 나의 집, 따뜻한 침대 속에서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다시 떠날 한 달 뒤의 캠핑을 떠올리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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