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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플 Jan 05. 2022

'밥 차리기'로 엿보는 타인의 삶

『밥상의 말』을 읽고 돌아본 우리 집 부엌 이야기

  목수정 작가의 『밥상의 말』 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소중한 사람을 위해 끼니를 차리는 과정을 고찰하며 '밥 차리기' 속에 담긴 잔잔한 추억들과 단출한 밥상에 묻어나는 따뜻한 마음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낸다. 동시에 식구(食口)의 주린 배와 메마른 입을 책임지는 사람들이 '밥 차리기'라는 가사 노동을 하며 겪었을 심리적 갈등과 애환을 재조명한다.



  독립을 하고 나와서 한 달 정도는 요리가 매우 즐거웠다.  독립을 결정한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내가 먹고 싶은 식단'을 꾸리는 것이었기에, 나를 위해 끼니를 만드는 과정이 신비롭고 풍요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만들고 싶어 했던 레시피의 반복, 직장에 차마 두고 오지 못하고 축적된 피로, 냉장고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재료들이 쌓이다 보면 나를 위한 ' 차리기' 지긋지긋한 노동이 되는 것임을 최근에서야 실감했다. 독립한  반년이 지난 지금 요리를 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면, '매일 밥을 차려주고 싶은 사람' 결혼해야겠다는 소소한 다짐 정도이다. 언젠가는 지긋지긋한 것으로도 모자라 피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사람의 끼니는 내가 챙겨줘야겠다는 강한 의무와 책임감을 가지게 하는 사람이라면 함께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상의 말』책 초반에는 딸의 매 끼니를 걱정하며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 하던 어머니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중후반부로 접어들면 그 어머니의 식탁이 빛을 잃는다.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부모님이 차려 준 식탁이 빛을 잃을 때, 자녀는 세월이라는 피할 수 없는 화살을 맞은 부모님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만다.



  대학병원 3교대 간호사로 근무하는 엄마에게 경제권을 넘겨주고, 엄마를 대신하여 4남매 자식들의 주린 배를 어떻게든 채우려고 아빠는 매번 지겹게 칼국수를 끓이셨다. 직접 밀가루를 치대서 면을 뽑고 바지락을 잔뜩 넣어서 끓인 칼국수였기에 맛은 훌륭했다. 단지 매 끼니가 칼국수여서 지겹도록 지겨웠을 뿐이었다. 자식들이 용기 내어 칼국수가 싫다고 투정을 힘껏 부리면 잔치국수, 수제비, 꿀꿀이죽을 번갈아가며 차려 주셨다. 밥상머리에서는 투정 없이 감사하며 먹어야 함을 알았기에, 아빠가 식사를 먼저 마치고 담배를 태우러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빠 몰래 칼국수를 버리려고 나와 동생들은 서로 망을 보았다.




  나와 동생들이 아빠가 해준 요리를 지겨워한 만큼, 아빠도 요리하는 것이 지겨웠겠다는 생각을 책 읽고 처음으로 했다.


  '남자'가 경제적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장남으로 자란 아빠는 식탁에 올라가는 음식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둘째가 태어난 후, 자존심과 다름없는 경제권을 엄마에게 넘기고 전업주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식단을 짜는 법도 모르고, 다양한 요리를 시도해 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아빠의 최선책은 어린 시절 아빠의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이 차려 준 밥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칼국수, 수제비와 같은 보릿고개를 넘기 위한 생존의 음식들을 아빠는 최소 이십 년 이상 복기하면서 자식들의 주린 배를 채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부엌을 든든히 지켰던 것이다.



  뇌경색과 함께 노년기를 남보다 빨리 맞이한 우리 아빠는, 이제는 간도 맞지 않고 양 조절도 하지 못해서 매번 버리기만 하는 요리를, 책임감 하나만으로, 끊임없이, 묵묵히, 매일 만든다.


  고혈압과 당뇨를 안고 살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사랑하는 아내인 우리 엄마를 위해 아빠는 최선을 다해 엄마가 먹어서는 안 되는 칼국수와 잔치국수와 떡만둣국을 끓인다.


  보다 못한 막내가 요리 실력을 발휘해서 맛있는 순두부찌개를 끓여도, 원래 먹던 맛이 아니라며 드시지 않는 아빠를 상대로 가족들은 주방에서 소리 없는 전쟁을 벌인다.




'밥 차리기'라는 일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누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는지, 무엇을 해주고 싶은지 엿볼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라보는 주방의 모습은 새롭다.

  

마음은 이십 년 전 그대로이지만, 점점 빛을 잃어가는 낡은 아빠의 부엌을 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동시에 앞으로 나의 부엌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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