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에세이 - 사랑과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3
그냥 모두 다 잘 잤으면, 부디 모두 다 평온하게
- 선우정아, <Serenade>
오늘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가 있는 날이다. 공연장 앞의 기나긴 입장 행렬에 동참하는 대신 집에서 유튜브를 켜놓고, 라이브 방송이 시작되길 기다린다. 침대에 드러누워 스탠드 조명을 켜고, 푹신한 이불에 몸을 파묻으면 준비 완료. 재즈클럽이라는 공연 테마에 맞게 근사하게 멋을 낸 가수와 달리 나는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곡이 끝날 때마다 쏟아지는 박수갈채 대신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팬들의 주접(?) 댓글을 구경하는 한밤의 재즈클럽. 공간을 가득 채우는 베이스와 몸을 부대끼며 즐기는 타인의 존재가 그립긴 하지만, 안방 1열에서 감상하는 라이브 공연도 나쁘지 않다.
전라남도 곡성군 어딘가의 시골 외딴집에서도 서울 한복판의 재즈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니, 유튜브와 4K 시대 만세다. 이건 모두가 집 안에 있어야 해서 생긴 뜻밖의 기회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크게 유행하면서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하여, 감염 위험이 높은 집단 시설의 이용이 제한되면서 공연장도 모두 운영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공연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되자, 아티스트들은 영상을 올리거나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해 직접 방 안의 관객을 찾아 나서고 있다. 2020년 1월 국내 첫 감염자 발생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한 번도 겪지 못했던 낯선 단절과 새로운 연결의 상황을 경험하는 중이다.
모두가 애써 연결을 이어가고 있지만 고립된 기분을 완전히 극복하는 건 어렵다. 곳곳에 숨어있는 카페와 소품샵을 찾아 골목을 누비던 홍대 앞 북적이는 거리,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즐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뛰놀던 봄날의 잔디 광장, 유명한 작품 앞에서 인증샷이라도 하나 남기려 줄 서서 기다리던 미술관 앞 풍경. 사람이 많아서 짜증스럽고, 오래 기다려야 해서 지치던 시절이 절로 그리움 필터를 끼고 눈 앞에 펼쳐진다. 스마트폰 액정 안 재즈클럽을 벗어나 진짜로 라이브 공연을 보러 갈 날은 언제쯤일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사그라지면 우리는 기다리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사는 전라남도 곡성군은 지금까지 확진자 0명으로 다행히 방역이 잘되고 있는 곳이다. 다른 지역에 비해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그래도 소소한 변화를 몇 가지 꼽아볼까.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에 맞춰 회사에서는 다 함께 며칠간 재택근무를 해봤다. 그때의 경험이 꽤 괜찮아서 4월부터는 자율 출퇴근이 가능한 날을 주 3일로 늘렸다. 원격으로 근무해도 어려움이 없는 일이다 보니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운영 중. 코로나 때의 재택근무 경험을 계기로 ‘스마트 오피스’로의 변화를 꾀하는 기업도 많다고 하니, 앞으로도 변화는 계속되지 않을까.
직장 생활의 변화는 꽤 반갑지만 여가 시간은 기다림의 연속이다. 군내 하나밖에 없는 영화관은 문을 닫은 지 오래, 새로 개장한다는 수영장도 연기, 보고 싶었던 공연도 취소. 연기, 취소, 연기, 취소, 무기한 대기. 당연히 필요한 조치라지만 끝없는 기다림에 조금씩 지쳐간다. 대면 접촉을 피하다 보니 가족을 만나러 가는 일도, 멀리 사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는 일도 어렵다. 곡성으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염병이 도는 바람에 새로운 지역에 대한 낯섦도 떠나온 지역에 대한 그리움도 그대로 남아 어딘가 붕 떠 있는 것만 같다. 주변과의 소통이 어려워 '코로나 블루(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우울감을 느끼는 것을 일컫는 신조어)'를 겪는 사람들이 늘었다는데, 나의 요즘도 퍽 '블루'하다.
곁을 채우는 것은 수많은 콘텐츠뿐이다. 마침 집안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 세계의 문화 콘텐츠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나 전자책, 오디오북을 통해 무료로 풀리고 있다. 무형의 것뿐만 아니라 박물관이나 미술관 같은 물리적 공간도 가상현실을 통해 충분히 접근할 수 있단다. 나는 요즘 어딘가에서 무료로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부지런히 저장한다. 내가 언제 또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3시간짜리 오페라를 보겠는가? 모두 다 보지는 못해도 이때다 싶은 마음에 기꺼이 접속한다. 지방에 사는 내가 코로나 시대를 맞아 문화 인프라에 접근할 기회가 오히려 늘었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떤 아이러니를 느끼기도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만이 위로하는 밤
낮에는 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 빌렸다. 서가를 누비며 읽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를 수는 없지만,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하면 책을 대여하는 건 가능하다 (사서 선생님이 도서관 입구에서 발열 검사를 하고 책을 직접 찾아 빌려주신다). 마음 한구석이 좀 말랑해졌으면 해서 정세랑 작가의 소설 『지구에서 한아뿐(2019, 난다)』이라는 책을 빌렸다. 지구의 그 누구보다 철저한 저탄소 삶을 살아가는 환경주의자 한아와, 그런 한아에게 첫눈에 반해 2만 광년을 날아 지구로 온 외계인 경민이 사랑에 빠져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하는 이야기였다. 성공할지 아닐지도 모르는 사랑을 위해 우주 어딘가에서 2만 광년을 날아오는, 광물에 가까운 외계인의 존재라니. 별이 밝은 곡성의 밤하늘을 나도 괜히 로맨틱한 눈빛으로 쳐다보게 된달까···.
함부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단절의 시기, 자유롭게 흘러가고 흘러오는 이야기만이 위로하는 밤이다. 한밤의 재즈클럽이든, 사랑밖에 난 몰라 외계인의 지구 사랑 정복기든, 누군가 애써서 다른 이와 연결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때 나는 위로 받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이의 눈을 보며 말하는 것도, 손을 잡고 포옹을 나누는 것도 힘든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저마다의 방법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기를 바란다. 평범이라는 것이 사실은 엄청나게 운이 좋고,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상태라는 것을 느끼며, 나의 의지를 당신에게 드린다.
[사랑과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이번 호를 쓰는 건 유난히 어려웠다. “여긴 그래도 괜찮다”라고 말할 때의 미안함이 있어서 그럴까. 연결된 사람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거리를 두어야 하는 괴로움도 작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나 한 사람의 경험으로 이 지역에 사는 모두의 사정을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하루하루,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을 견디어 통과하고 있는 모두의 사랑과 평화가 무사하길 기도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그냥 모두 다 잘 잤으면, 부디 모두 다 평온하게.”
글 | 제소윤
사진 | 조소은
본 콘텐츠는 웹매거진 농담(nongdam.kr) 3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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