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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Apr 21. 2022

영희씨의 아들, 나의 남편

"정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란 세상 피곤한 관계이지요.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그들 사이에 끼어 살아온 저는 웁니다."


남성 독자 한 분이 남긴 댓글이다. 내 편에서는 드릴 말씀이 마땅찮아, 그 힘듦에 대해 공감한다는 알량해 보이는 답을 한 줄 남겼다. 그러다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끼어 살아온' 그들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나에 대해 그들이 그렇듯 나 또한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짊어진 짐의 무게를 어렴풋이 짐작해보았다. 그러다 남편에게 생각이 미쳤다. 고부관계는 남편이 가운데서 '잘' 해야 한다는 진부한 담론이나 논쟁은 제쳐두고, 별 시답지 않을 내 남편에 관한 잡담을 해보고 싶어졌다.


내 친구 하나는 남자 친구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세심한 면에 결혼을 결심했다. 그런데 그 좋았던 면이 막상 결혼 생활을 해보니 단점이 되기도 한다며 털어놓았다. 그의 다정다감함의 대상이 딱 아내만이었던 것은 아닌 탓이다. 친구 말에 따르면, 그는 아내를 챙기는 만큼 자신의 가족도 열과 성을 다해 챙겼다. 가족의 대소사에 빠짐없이 관여했고, 사촌에 팔촌까지 모이는 몇 박씩 되는 가족 여행에도 내 친구와 아들을 늘 대동했다고 한다. 지방에 있는 가족 누구라도 서울에 머무르게 될 때면, 당연히 그의 집은 호텔이 되었다. 온갖 가족 행사에 무조건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필참 하는 남편 덕에 한동안 친구는 빡빡한 주말 일정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했다.

여전히 자기에게 다정한 남편이 고맙긴 하지만, 자신의 가족에게도 지나치게 정을 쏟아부으니 그것대로 또 서운함이 생긴다고 한다. 그녀는 정이 많은 남자를 택한 대가라는 표현을 썼다. 대화 말미에 그녀가 덧붙이길, 자신의 남편은 '효자'였고 결혼한 지금도 '효자'란다. 그래도 흔히들 하는 말처럼 결혼 후 '효자로 변하는' 남편은 아니어서 다행이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나의 남편은 정 반대다. 남편은 싹싹하다거나 다정한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그는 나보다 딱 손톱만큼 더 다정한 연애 상대였다. 기념일을 잊지 않고 (나보다) 열심히 챙겼고, 나는 치를 떠는 각종 이벤트에도 열심이었다. 공감능력은 타고나길 제로였으나, 공감하는 법은 학습하면 얼추 흉내 낼 수 있을 정도의 기계적 다정함을 갖췄달까. 어쨌든 무던한 성정의 나에 비하자면 그는 무척 자상했다.


남편은 원래가 사람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외향적이라 누구와도 쉽게 말문을 트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고,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여는 일도 드물었다. 사람에 관한 나름의 기준도 엄격해서 그에게 진정한 친구로 낙점받기란 꽤나 어려운 일처럼 보였다. 그래도 한 번 우정을 나눈 친구들에 대해서는 온 마음을 다했다. 친구들과 지나치게 자주 어울린다거나 음주가무를 즐긴다거나 하는 일은 전무했고, 이런 면은 내가 결혼을 택한 여러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약간은 매정하고 건조해 보일 수 있는 그의 그런 면을 나는 사랑한다.


우리끼리 말로 그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기대가 없는' 타입이다. 우습게도 그 '사람'의 범주에는 자신의 가족도 포함되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흔히들 말하는 효자 남편, 혹은 결혼과 동시에 돌연 효자가 '된' 부류는 절대 아니다.

연애시절부터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 없어 보였다. 그로부터 아버지를 존경한다는 말은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러나 어머니에 대해 이렇다 할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저 젊을 적에 이런저런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사실 정도. 남편은 어머니의 고생스러웠던 삶에 대해 연민과 감사를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어쨌든 그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애정을 크게 느낄 수 없었다. 도의적 수준의 애정이라고나 해야 할까.

아, 물론 그렇다고 남편이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없는 냉혈한은 절대 아니다.


모자 관계를 짐작케 한 일화를 들은 적이 있긴 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서 벗어나 기숙사가 있는 학교로 가고파 열심히 공부를 했더니 기숙사가 있는 지역 명문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청소년 드라마의 전개를 닮은 그의 성장 스토리. '남편을 키운 건 팔 할이 어머니의 잔소리'쯤 되려나. 어쨌든 덕분에 그는 공부를 열심히 했고 꽤나 잘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소 엉뚱한 전개의 성장기였지만, 그와 어머니가 끈끈한 애정으로 이어진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헤아려볼 수 있었다.


어찌 됐든 이런저런 사실들로 미루어 짐작해볼 , 그는 어머니와 그다지 각별해 보이지 않았다. 불평등이 난무하는 한국의 가족 문화에 염증을 내던 '거의' 비혼주의자였던 내가, 그와 결혼해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이 기운 이유이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효자는 아니니 적어도 내가 마음고생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안일한 생각이었다.)


결혼 후 내가 겪어야 했던 그의 가족과의 크고 작은 불편한 경험들에 그는 대개 공감해주었다. 물론 내가 기대하는 만치 적극적으로 상황에 개입하거나 대처하지는 않았지만, 못 살겠노라 할 만큼의 불만은 없이 그런대로 지내왔다.


그런 그가 자신의 어머니, 영희씨의 기분을 퍽 상하게 한 일이 있었다. 별 것 아닌 일로 나에게 여러 번 핀잔을 주는 영희씨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식사 도중에 식당 화장실로 가 몰래 울고 나왔다. 그 일이 있고서 그는 집으로 돌아와 영희씨를 따로 마주하고는 쓴소리를 내뱉었다. 아들에게 모진 소리를 들은 영희씨는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한동안 우리에게 뾰로통하게 굴었었다. 중간에서 난처했지만, 나를 대신해 입을 떼준 남편이 고마웠다.

물론 그렇지 못한 날이 더 많았다. 함께 하며 지낸 긴 시간 동안, 남편이 나의 어려움을 헤아려주지 않아 서운했던 일도 많다.


영희씨 덕에 겪은 일들에 대해 남편에게 토로하노라면, 남편은 늘 몇 가지 패턴의 반응을 보인다.

"거 참, 어머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머니가 잘못했네."

"기분 많이 상했겠네."

"어머니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거야. 전달 방법이 잘못된 것 같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은 줄은 몰랐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릴게."

"너도 알겠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와서 바뀌기는 쉽지 않을 거야. 우리가 포기해야 할 부분도 있어."


보다시피 나에게 대단한 반기를 들거나,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 함부로 말한 적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어딘지 모르게 '네가 조금만 참아.'의 뉘앙스가 풍기는 말들을 듣고 있노라면, 속상했다. 남편이 양해를 구하고 희생을 바라기 더 수월한 쪽이 역시 나인가 싶어서였다. 아내만 참으면 그래도 가족 간 그럭저럭 잘 지내는 모양새로는 별 문제가 없으니 손쉬운 해결책을 택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더 맹렬히 그를 비난했다.

 

"어머님만 바뀌면 해결될 문제를 왜 자꾸 나더러 참으라고 해. 어머니께 말 꺼내는 편 보다는, 내 쪽에 희생을 바라는 게 너에게 더 편하고 덜 껄끄러운 방법이지? 솔직히 그래서 나한테 참으라는 거잖아."


어딘가 있을 법한, 우리 모두 알고 있으나 누구도 본 적은 없는 유니콘 같은 남편들을 들며 처절하게 비교하기도 했다.


"누구네 남편은 얼마나 중재를 잘한다던데, 어머니가 막말하시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적하고 말조심시킨대.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함부로 안 한대잖아. 애초부터 선을 그었어야 하는데, 너는 한 번도 그런 적 없잖아. 그러니 어머님이 괜찮은 줄 알고 계속 선 넘으시는 거야. 바로바로 말씀드려야 안다니까. 그걸 아들인 네가 해야지. 자기 부모 자기가 책임지자 좀!"


그도 적잖이 난처했겠지.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과는 꽤 거리가 먼 영희씨를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나만큼이나 답답하고 속이 상했을 것이다.

비단 내 남편뿐만 아니라, 본인이 '끼어 있다'라고 느끼는 모든 남편들이 그렇지 않을까.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부모 혹은 모친을 마주하며 그들은 어떤 감정을 느낄까.




이런 내 남편에게 나는 글을 쓰겠노라 말했다.

"나 어머님이 나한테 어떻게 하셨는지 다 글로 쓰려고. 그리고 브런치에다 올릴 거야."


그는 밥을 우물대며 말했다.

"그럼 나는 읽지 말아야겠다."

그래, 자기 부모의 치부를 드러낸 글을 누구도 기분 좋게 읽을 수는 없겠지. 그의 반응이 이해됐다. 그런 걸 왜 굳이 글로 쓰냐고 몰아붙이는 남편이 아니어서 고마웠다.


그러고서 그는 덧붙였다.

"뭐든 글로 쓰는 건 좋은 것 같아. 생각도 정리되고."

"맞아. 쓰다 보니 생각이 환기되기도 하고, 감정 해소가 되기도 하더라고. 나한테 좋아."

"그래, 뭐든 꾸준히 계속 써봐."


그날의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되나 싶었다. 그러나 식사 후 그는 생각이 바뀐 듯 말했다.

"나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주소나 이름 같은 게 있어? 알려줘 봐."


남편을 독자로 염두에 두고 덜 솔직한 글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당분간은 못 알려주겠노라 했다. 언젠가 분명 그도 내 글을 읽게 될 테다. 그날이 오면, 그는 내가 그동안 두서없이 쏟아 내온 지난 경험들을 보다 명료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밉기도 할 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에게 가장 솔직하게, 내 상처를 꺼내 두고 싶다. 그리고 또 다른 영희씨가, 아니면 그들의 며느리가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영희씨들은 영희씨대로 뜨끔했으면, 며느리들은 더 많이 더 자주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주면 좋겠다.


그런 내 뜻을 오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끼어 있을' 남편에게 고맙다. 나를 위해 결사 항전하는 투사까지는 아닐지언정, 나의 감정과 상처를 부정하지 않는 남편. 내 글을 읽을 남편이 내 경험의 층위를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어이, 현지인." 그가 내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장난스레 부를 때 하는 말이다. 내가 브런치 작가명으로 쓰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현지인' 세 글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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