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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Apr 27. 2022

어머님, 저 생일 선물 필요 없어요.

막말도 필요 없고요.

결혼 후 맞이한 첫 생일이었다. 내 생일은 늘 추석 무렵이었는데, 그 해에도 그랬다. 명절에 양가에 못 가게 된 남편과 나는 명절 전 주말, 시가를 들르기로 했다. 그날은 마침 내 생일이었고,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을 시가에서 보내게 된 것이다. 그게 어찌 됐든, 나는 마냥 들떴다. 시가에서 명절을 보내기보다 차라리 생일인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우리가 영희씨네를 방문한 것은 토요일 오후, 내 생일날이었다. 영희씨는 미리 케이크와 미역국을 준비해두었다. 누구네는 며느리한테 생일상 받아내려 든다던데, 싶기도 하면서 영희씨에게 한껏 고마웠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영희씨와 시아버지는 지금도 내 생일이면 꼭 용돈을 보내주신다. 감사한 일이다.


어쨌든 그날 나는 영희씨에게, 그리고 남편의 가족에게 고마웠다. 남편과 다른 가족들은 모처럼 함께한 주말을 새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며 단란하게 보낸다는 사실에 행복해 보였다. 영희씨 스스로도 '며느리 생일상 차려주는 시어머니'가 된 것에 내심 어떤 뿌듯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렇게 기분 좋은 생일을 보내나 싶었다.


다음날, 급하게 출근해야 할 일이 생긴 시아버지가 집을 나서며 영희씨에게 말씀하셨다.

"거 새아기 생일인데 백화점 가서 선물 하나 사주지 그래?"

영희씨는 그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시아버지가 몇 마디 더 덧붙이자, 그녀는 그럼 당신의 카드를 주고 가라 답했다. 아버님은 카드를 꺼내 두고 집을 나섰다.

 

결혼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던 때라 시어머니 영희씨와는 그저 동네 마트 가는 것도 부담스러울 때였다.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그녀의 모난 말을 감당하기 벅찼던 때기도 했다. 그런데 무려 '내' 생일 선물을 사러 가야 한다니. 첩첩산중이었다.


나의 불편한 마음은 차치하고, 가장 큰 문제는 영희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영희씨가 시아버지의 말을 듣자마자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나에게 선물을 사주라는 느닷없는 어명을 내린 남편에 대한 불만인지, 백화점 가기가 귀찮고 번거로워서인지, 며느리에게 선물을 사주는 상황이 싫어서인지, 혹은 그저 며느리가 싫어서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희씨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알겠노라 하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무슨 생일 선물요. 전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눈치 없는 남편은 방실방실 웃으며 거들었다.

"사주신다는데 가자. 가서 구경해보고 갖고 싶은 거 고르면 되지. 같이 나가자."


등 떠밀리듯 선물을 사줘야 하는 영희씨를 앞세워 백화점으로 향한다한들, 어떤 선물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까 싶었다. 무얼 사야 할지, 적정한 가격대는 어느 정도 일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수한 선택지 중, 내가 갖고 싶은 것과 영희씨의 마음에 들 것의 교집합을 찾아내기는 벌써부터 막막해 보였다.


나와 남편, 영희씨는 결국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을 둘러보는 영희씨는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달리 무얼 구매할 의욕과 의향이 없는 사람처럼 심드렁하니 백화점을 거닐었다. "사고 싶은 거 골라봐라." 한마디 던져놓은 채 이리저리 매장과 매장 사이를 지나쳤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그 옆을 따라다녔다.


영희씨가 앞서 나가 살짝 거리가 생겼을 때, 남편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나 못 고르겠어. 저렇게 지나치기만 하시는데 어딜 들어가서 뭘 고르라는 거야."

"너 좋아하는 브랜드 들어가자고 해서 고르면 되지. 그냥 편하게 마음대로 골라."

편하게, 마음대로가 안되니 남편에게 SOS를 요청한 것이건만, 영희씨의 아드님은 해맑은 표정으로 뻔한 답을 내줬다.

  

내가 가장 난처했던 것은, 영희씨가 매장에 들어가 구경하고픈 마음이 없어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저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한 층을 한 바퀴 도는 것이 목표인 마냥, 앞으로 앞으로. 그런데 거기다 대고 "저 이 브랜드 좋아해요. 여기 들어가 봐요.", "이거 사주세요." 뻔뻔하게 외칠 수 있을 며느리가 몇이나 될지 궁금하다. 당연히 나는 말하지 못했다. 나의 온 신경은 영희씨의 불편한 심기에 쏠려 있을 뿐이었다.


이도 저도 못하고 있을 때, 그녀가 갑자기 한 여성복 매장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 이 옷, 저 옷 진열된 옷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옷 하나 골라봐. 사줄게."

"아니에요, 옷 너무 많아요. 이미 있는 것도 너무 많아서 다 못 입어요."


그녀가 기껏 생각해낸 제안에 냉큼 '예, 알겠습니다.' 안 한 게 문제였을까. 그녀가 매장 밖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옷이 그렇게 많은데 이렇게 입고 다니나."


귀를 의심한다는 진부한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었다. 그때 나는 정말 잘못들은 줄로만 알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남편에게 몰래 다가가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맞냐고 재차 물어보기까지 했다.


"취향이 다른가 보지. 아무 말이나 하신 것 같은데 신경 쓰지 마."

위로가 안 되는 위로를 속삭이며 눈 찡긋 하는 남편을 보니, 비로소 내가 들은 말이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나에게 아무 말이나 한 게 문제인건데, 신경 쓰지 말라고? 거참.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신 걸까. 내 옷차림에 그녀는 그동안 무슨 불만이 있었던 걸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날까지 나는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차림새로 지적받거나 비난받은 적이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입고 다니냐는 비아냥 섞인 표현은 더더욱이 들어본 적 없었다. 나약한 나는 그녀의 노골적인 비난에 KO패하고 말았다.


, 물론 영희씨와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은 천양지차다. 영희씨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선호를 나에게 알려준 적은 없었다. 다만 영희씨는 그녀의 말을 빌려 '  있는 아줌마임에도 날씬해서 저렴한 보세 옷을 입어도 태가 난다' 그녀의 딸을 자주 치켜세웠었다. 그런 그녀의 , 나의 시누이의 평소 스타일플로럴 프린팅, 레이스, 미니 스커트, 파스텔톤, 하이 정도대표. 추정해보건대, 영희씨는 내가 다소 '여성스럽지 않은' 차림새로 다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렇게 지적 아닌 지적을 받은 그날 이후 나는 영희씨를 만나는 날이면, 부쩍 옷차림에 신경이 쓰였다. 검은색 옷을 너무도 사랑하는 나는 부러 몇 없는 밝은 색의 옷을 고르기도 했다. 영희씨네까지 네다섯 시간은 족히 걸렸기에 편한 옷을 입고 싶었지만 '차려입은' 불편한 옷을 고르기도 했다. 그러고서도 내심 영희씨가 또 차림새를 지적할까 걱정이 되었다.


아무에게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있는 존재, 영희씨에게는 그게 나였던 거다. 며느리.

숙고필요 없고, 배려도 필요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무례하게 말해도   없을 존재. 막말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하는  아닐지라도, 나오는 대로 내뱉어도 파국으로 치닫지않을 관계. 영희씨가 정의 내린 자신과 며느리의 관계는 그런 것이었을 테다. 그렇지 않고서야 영희씨의 행동을 이해하기힘들다.


어쨌든 그때의 나는 무례한 말에 따져들지 못했고 애꿎은 남편에게 화풀이만 해댔다.  후로도 그녀는 이렇다  별다른  없이 백화점을 거닐기만 했다. 그러다 내가 귀걸이 하나를 사겠노라 겨우 말했다. 이것저것 껴보다 귀걸이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가격을 듣고 너무 비싸다 말했고, 멋쩍어진 나는 다음에 면세점에서 사는 편이 낫겠다 했다. 결국 그날 기분은 기분대로 했고, 선물도 고르지 못했다.


매장을 나서며 영희씨가 말했다.

"그냥 돈으로 줄게. 다음에 사고 싶은 거 사."




이상하게도  글을 쓰다 보니, 자꾸  스스로에게 비난과 의심의 화살이 향한다.


내가 시아버지의 제안을 처음부터 강하게 거절했어야 했나? 그래서 백화점에 갈 일을 아예 만들지 말았어야 했나?

남편과 영희씨를 진두지휘하며 '이거 사주세요, 저거 사주세요.' 예의 차리지 않고 나섰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아마 그랬다면 그녀는 나에게 '우리 며느리는 갖고 싶은  많아서 좋네.' 했으려나?

무슨 옷을 이렇게 입고 다니냐는 말을 들었을 , '이런 옷밖에 없으니 이 참에   하나 사주세요.' 영희씨의 말에 맞장구쳤다면 그녀의 기분은  나아졌을까?


무수한 의심과 물음표가 솟구치지만, 또렷하고 명확한 답은 없다. 내가 영희씨의 뾰족한 말에 상처받았다는 사실만이 나에겐 또렷하고 명확하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이렇게 입고 다니냐니, 무슨 뜻으로 말씀하 거예요? 제가 어머님한테 '대체  그렇게 입고 다니세요?'라고 해도 되는 거예요? 제가 하면  되는 말은 어머님도 하면  되는 거죠. 웃어른이라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아니에요. 게다가 외모나 차림새 지적하는 , 그거 엄청 무례한 거예요. 앞으로 절대 절대 삼가 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물 사달라  적도 없으니, 그렇게 싫으면 처음부터 싫다고 하세요. 여과 없이 불편한 내색 하며, 주변 사람 힘들게 하지 마시고요."

혼자서 소리 내어 말해보았다. 아주 못돼 먹은 목소리 톤으로. 그렇게 해야 실전에서  목소리의 반의 반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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