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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지인 Apr 05. 2022

제 젖의 안부를 묻지 마세요.

아이를 낳고 나서 시어머니 영희씨와의 관계는 더욱 사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대를 이을 장손을 품에 안은 기쁨에 취해 며느리와의 관계에 생긴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며느리인 나는 출산 후 '을 중의 을'로 격하된 나의 위치를 새삼 뼈저리게 깨달았다. 한 세대 앞서 아이를 낳아 길러본 선배 엄마가 어찌 새내기 엄마에게 그리 혹독하신지. 정말 이상하고도 이상했다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됐다.


아이를 키우며 해가 거듭될수록, 그녀의 언행들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는 지금도 갓난아이 키우는 부모, 특히 엄마들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깜깜하고 끝없는 터널 속을 손전등 하나 없이 혼자 걷고 있는 그 기분. 경험해봤기에 더 마음이 쓰이고 얼마나 힘들지 짐작이 간다. 나이가 들면 이런 감정은 사그라들고 그저 혹독한 시어머니가 되어버리는 건가.


출산 후 몇 달간 영희씨와 가장 불편했던 지점은 내 젖 사정을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보고 이래라저래라 마음껏 훈수 둔다는 것이었다. 내 젖은 영희씨에게 그저 손주 밥통 정도 되는 듯했다. 비견할 데 없는 영양가 좋은 밥을 짓는 그 어떤 만능 밥통 즈음 말이다.


먼 거리 탓에 자주 왕래하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영희씨는 만날 때마다 젖 타령을 그렇게도 했었다.

아기가 조금만 칭얼대도 '배고프다. 젖 줘라.' 하였고, 시간이 조금 지났다 싶으면 역시 '배고프다. 젖 줘라.' 했다. 그리고 그 젖 타령은 틈틈이 '젖은 잘 도는지, 양이 충분한지, 아이는 잘 먹는지' 여러 형태로 변주되었다. 젖 타령의 최고조는 '젖의 우수함'을 칭송하는 데 있었는데, 영희씨의 젖 타령은 보통 그 레퍼토리 안에서 반복되곤 했다.


안타깝게도 영희씨의 며느리, 나는 '모유가 나오면 주고 아님 말고'주의였다. 나로서는 모유수유에서 오는 여러 스트레스가 더 컸다. 아예 안 먹이는 것도 아니니, 적절히 분유와 섞어 먹이며 내 몸도 마음도 편하게 키우고 싶었다. 엄마 마음 편한 게 제일이다 싶었지만 영희씨의 바람은 달랐다.


영희씨와 잠깐이라도 같이 지내게 되는 날이면 그 스트레스는 더 심해졌다. 심지어 하도 젖 물려라 소리를 들었던 어느 날은 몰래 분유를 타서 젖병을 숨긴 채로 방에 들어가기도 했다. 그러고서 분유 먹고 노는 아이와 멍하니 30분을 앉아만 있다 나온 적도 있다. 역시나 방을 나서자마자 들려온 말은 "젖 잘 나왔나? 얼마나 먹더냐?"였다. "두 젖 모두 시원하게 나오네요. 두 통 싹 다 드셨습니다."라는 말이 듣고 싶으셨던 걸까.


모유 수유는 원하는 대로 잘 되지 않았다. 엄마의 의지도 크지 않은 데다 아이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거기에 영희씨에 대한 약간의 묘한 반항 심리까지 더해져 나는 아이가 100일이 채 되기 전에 모유 수유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영희씨에게 당당하게 외쳤던 날이 기억난다.

"제가 너무 힘들어서 모유 그만 먹이려고요."

사실 그렇게 당당하지는 않았던 것도 같다. 초유도 먹였고 적어도 3개월 먹었으니 좋은 젖은 다 먹였다며 나직이 속삭이듯 덧붙였었다. 영희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고도 꽤 오랫동안, 나는 아이가 잔병치레를 할 때면 영희씨가 '모유 덜 준' 나를 탓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젖 타령하는 시어머니는 영희씨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상하다. 모유수유가 얼마나 힘든지도 경험했을 테고, 아기 엄마에게 훈계 아닌 훈계들이 얼마나 듣기 고역 인지도 다 경험했을 텐데 말이다. 당장 우리 엄마는 나에게 '힘들면 억지로 하지 말아라, 네가 제일 우선이다.' 하는데. 역시나 시어머니는 내 엄마가 아니라서 그런가 보다고 결론짓게 된다.


너도 한번 당해봐라 심보인 건지, 모유수유를 금과옥조로 여긴 세대라서 인지, 아니면 귀한 손주 좋으라고 그러는 건지. 어떻게 생각해봐도 진심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내 새끼 귀하면 남의 새끼도 귀한 법이라는데, 남의 새끼인 며느리의 힘듦은 아랑곳 않는다. 다들 참 나쁘다.

우리는 훈계하고 간섭하고 강요하는 어른 말고, 아이 키우느라 고생하는 자식들을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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