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유튜브 1차 전투에 이어 불씨는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이가 정해진 시간만 보는 걸 익히긴 했지만, 언제든 욕심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도 하루에 한 잔만 커피를 마시기로 했지만 가끔 두 잔, 세 잔의 유혹이 찾아온다. 아이는 비교적 잘 해냈지만 졸리거나 피곤하면 짜증지수가 올라갔다. 평소 갖고 싶어하던 핑크색 화장대를 아빠가 사준 날, 화약고가 터졌다.
한창 화장대에 관심 가질 나이, 4세.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출근하지 않고 쉬고 싶은 날이 있다. 마찬가지로 아이도 어린이집에 가기 싫은 날이 있다. 유독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쓴 날, 아이에게 그럼 뭘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핑크퐁 볼래"
"뭐? 어린이집 다녀와서 봐."
집에서 놀거나 산책하겠다고 하면 데리고 있으려고 했는데, 유튜브를 보겠다니... 그냥 어린이집에 보내는 게 나을 것 같아 잘 어르고 달래서 어린이집에 보냈다. 아이는 집에 오더니 잊지 않고 말한다.
"어린이집 다녀왔으니 핑크퐁 보여줘."
아이들은 기억력이 좋다. 특히 자신에게 유리한 건 더 잘 기억한다. 약속을 했으니 유튜브를 보여줬다. 아이는 그렇게 매일매일 어린이집에 다녀오면 유튜브를 보여달라고 했다. 당당하게 내가 맡겨 놓은 권리를 요구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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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시간이라도 매일 봐도 괜찮은 걸까 싶을 즈음, 아기는 그날따라 피곤했는지 유튜브를 다 보고 나서 더 보여달라고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기가 갖고 싶어했던 화장대가 택배로 도착한 날이었다. 한동안 화장대에 빠져 놀겠구나 싶었는데 한두 시간 가지고 놀다 잊지 않고 유튜브를 찾았다. 떼를 쓰는 아이에게 아빠는 화장대를 버리겠다고 선전포고를 했다.
예전에 영유아검진을 할 때 소아과 샘은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아이에게 좋아하는 간식을 며칠간 주지 않는 등 불이익을 줘야 아이가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걸 꼭 기억한 건 아니었지만 아빠로서는 하나의 무기를 꺼낸 셈이다. 아이는 안 된다고 한발 뒤로 물러서면서 앞으로 유튜브를 보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휴전선이 생겼지만, 정말 내일부터 유튜브를 찾지 않을까 의심하는 마음을 거둘 수는 없었다.
유튜브를 끄니 생기는 일들
다음 날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녀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놀잇감을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평소에 집에서 이것저것 놀이들을 해줬는데, 이제는 그중에서 본인이 하고 싶은 걸 골라서 놀기 시작한다.
"우리 물감놀이 할까?"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배웠다며 손바닥 가득 물감을 묻히고 스케치북에 손바닥을 찍는다. 아이의 손바닥이 스케치북 에 물든다. 처음엔 물티슈로 닦다가 나중엔 물을 떠다 줬더니 이젠 물놀이까지 한다. 치우는 건 엄마 몫이다. 그래도 아이가 즐겁게 놀이하니 기분이 좋다.
"이제 클레이 놀이 할까?"
한 가지 놀이를 오래 하진 않는다.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하면 다음 놀이로 넘어간다. 아이 나름대로 하고 싶은 놀이가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듯하다. 클레이로 당근도 만들고 전자레인지도 만들고 한 상 가득 식탁을 차려본다. 아이는 그걸로 주방놀이를 하기도 하고 마트 놀이도 한다.
"이제 숫자 퍼즐할까?"
아이는 퍼즐을 좋아한다. 자동차, 동물 모양의 퍼즐을 잘 맞춰서 숫자 퍼즐을 사줬는데 처음엔 잘하지 못했다. 그래도 계속 도와줬더니 이제는 숫자 퍼즐도 제법 잘 맞춘다.(아직 숫자는 못 읽는다. 퍼즐 모양이랑 색깔 보고 맞춤)
한창 아이가 좋아할 만한 놀이와 장난감들을 산 적이 있는데 막상 아이가 기대보다 좋아하지 않아서 아쉬웠던 적이 있다. 근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게 처음엔 잘 안 가지고 놀던 장난감도 아이가 크면서 더 잘 가지고 노는 시기가 온다. 잘 가지고 놀던 건 커갈수록 더 다양하게 변형해서 가지고 논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놀이력도 상승한다. 아이는 여느 때처럼 유튜브를 찾지 않고 놀이를 계속 했다. 약속한 걸 정말 지키는 걸까? 신기하면서도 대견했다.
아이는 함께 놀 때 자란다
<장난감을 버려라 아이의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책에 보면, 아이들이 혼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것에 익숙해지면 장난감 없이는 못 노는 '장난감 중독'에 걸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놀이터에서친구들과 놀고 집에서 부모와 놀아야 하는데 플라스틱 장난감과 놀면서 사회성과 창의성이 제약받는다는 걸 여러 실험을 통해 알려준다.
가장 좋은 장난감은 부모이고, 정교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는 장난감보다 단순해서 아이가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장난감이 더 좋은 장난감이라고 말한다.
아이한테 장난감을 많이 사주는 편은 아니지만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책에 보면 유치원에서 장난감을 없애는 시도를 해보았는데, 처음엔 놀라고 당황하던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뛰어 놀고 친구들과 함께 놀이를 만들면서 더 재밌게 놀고 밝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에게 사주는 장난감을 최소화하고 자연에서 놀거나 새로운 걸 익힐 수 있는 놀이를 해주려고 한다. 선물 받은 스티커북이 있는데, 동물과 한글에 스티커를 붙이는 책이다. 아이는 다양한 종류의 새의 이름을 배우며 스티커를 붙였는데 다음 날 어린이집에 가면서 "저기 새가 있어. 어, 새가 어디 갔지?"하며 관심을 보였다. 한번도 새를 먼저 아는 척한 적이 없는데 함께 스티커를 붙이며 배웠던 게 아이기억에 남았나 보다. 아이가 경험한 폭만큼 관심을 가지고 시야가 넓어진다는 걸 알았다. 완성된 걸 주기보다는 아이가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러 환경을 만들어줘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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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 그날의 전투 이후 아이는 더 이상 유튜브를 찾지 않았다. 유튜브를 안 보니 떼도 안 쓰고 스스로 놀 거리를 찾아서 놀았다. 아이의 표정도 한층 더 밝아졌다. 사실 평소에도 유튜브만 아니면 아이가 떼 쓰거나 우는 일은 많이 없다. 밥 먹을 때와 머리 감을 때 빼고.
아이가 바뀌면 혹시 내 욕심으로 아이를 바꾼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마음이 슬며서 올라온다. 이상한 양가 감정이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절대 그런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아이에게 꼭 필요하고 옳은 걸 가르쳐 주는 건 너무 중요한 역할이라고 말해주었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유튜브를 보여준다. 나는 앞선 글에서도 얘기했지만 부모도 쉴 구멍이 필요하고, 유튜브가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이는 유튜브를 보면서 배운 율동들을 곧잘 따라하고, '캐리 언니' 시리즈를 보면서 무언가가 있으면 "오늘은 이걸 소개해볼게요. 자, 그럼 먼저 ~" 하면서 캐리 언니를 따라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그런데 아이가 유튜브를 보면서 짜증이 많아지고 거기에만 빠지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한번쯤은 전투를 해서라도 태세를 전환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
아직 3차전은 또 언제 찾아 올지 모른다. 아이에게 유튜브를 보여줄 때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결코 편하지 않았다. 아이가 유튜브를 보지 않고 엄마와 함께 놀이할 때 표정도 밝아 보였고 나 또한 아이와 노는 게 한결 더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절대 긴장의 끈을 놓칠 순 없다. 언제든 전투는 예고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번의 전투로 이제는 서로 좀 더 단단해졌겠지?(나의 기대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