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건물의 재발견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이를 먹고,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면 몸담았던 일을 그만두고 은퇴를 하기 마련입니다. 건물도 마찬가지겠지요. 하지만 원래의 임무를 다 했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듯, 세상에 쓸모없는 건물 또한 없습니다. 버려진 건물만 있을 뿐이죠. 이런 버려진 건물들을 고쳐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시키는 ‘건물 업사이클링’이 엄연히 하나의 건축문화로 자리 잡은지 오래입니다.
오늘 소개할 몇 군데의 공간도 원래의 기능을 다한 건물들이 은퇴 후 ‘제2의 건생(建生)’을 시작해 그 자리를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는 곳들입니다. 처음의 용도와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쓰이는 공간도,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공간도 있는데요. 덤으로 관광명소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각 건물들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긴 세월 방치된 돌창고, 청년들이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는 공간으로
1970년대 남해대교가 놓이기 이전까지 섬이었던 남해에서는 예로부터 돌창고를 만들어 곡식과 비료를 보관하곤 했습니다. 지리적 특성상 외부에서 건축자재를 들여오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화강석을 이용해 창고를 만든 것이죠. 제 기능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고,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 된 돌창고는 그대로 긴 세월 방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 2016년, 문화콘텐츠 기획자 최승용과 도예가 김영호가 함께 시작한 ‘돌창고 프로젝트’를 통해 남해지역의 돌창고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이름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돌창고 프로젝트’는 지역에서 문화와 예술로 삶의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인데요. 남해에서 살아가며 젊은이들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대정리에 있는 대정돌창고와, 갤러리로 쓰이는 시문돌창고 두 개의 공간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나가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더욱 특별하고 뜻 깊은 이유는 남해라는 지역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청년들이 스스로 문화 인프라를 구축하게끔 하고, 지속적인 예술 활동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산과 바다가 아름답게 펼쳐진 남해에서, 남해 사람들의 가장 소중했던 것을 보관했던 견고하고 아름다운 공간인 돌창고를 배경으로 한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더 아름답게 빛날 수 있기를 기대해도 되겠죠?
[INFO]
‘남해 돌창고 프로젝트’ http://dolchanggo.com
-대정돌창고
add.경남 남해군 서면 스포츠로 487
tel. 055-863-1965
-시문돌창고
add. 경남 남해군 삼동면 봉화로 538
tel. 055-867-1965
대구시 수창동에는 구 KT&G 연초제조창 별관 창고와 사택이 있습니다. 그 중 1976년부터 관사로 이용됐으나 1996년 폐쇄 이후 20년이 넘도록 버려져 방치된 채 골칫거리로만 여겨졌던 폐아파트가 시민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예술 공간 ‘수창청춘맨숀’으로 재탄생했습니다. 낡은 건물의 외벽을 살려 아파트가 가진 50년의 세월을 보존함과 동시에, 정돈된 내부를 청년 작가들의 예술 활동 무대로 만들면서 옛것과 새것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죠.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폐아파트
문화예술공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수창청춘맨션에서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는데요, 특히 청년 예술가들에게 창작공간과 더불어 지역의 문화적 경험을 통한 다양한 예술 창작의 기회를 제공하는 ‘레지던시 입주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청년 예술가들의 인큐베이팅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전시와 공연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대구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하는 수창청춘맨숀. 지역 주민들의 공간이자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도 활발히 운영 중이니 대구여행을 간다면 한 번쯤 이 곳을 방문해 청년 예술가들의 공간을 온전히 느껴보는 건 어떨까요?
[INFO]
‘대구 수창청춘맨숀’ http://www.suchang.or.kr/su/
add.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로 22길 27 (수창동 64)
tel. 053-252-2566~70
90년대 중반 공유수면 매립지를 새로운 도시설계지구로 계획해 젊은 유동인구가 많이 모이던 제주시 탑동에는 탑동광장을 중심으로 영화관, 카페, 패스트푸드점 등을 중심으로 조성된 테마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9년, 젊은 유동인구의 소비 요구에 맞추어 복합영화상영관 ‘시네마극장’이 개관했죠. 당시만 해도 도내에서는 드물었던 멀티플렉스 영화관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 격 영화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대규모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이 속속 생겨나면서 소규모 극장들의 경영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네마극장은 대규모 증축공사를 통해 편의시설을 확대했지만 계속되는 재정악화로 결국 2005년에 폐관되고 말았습니다.
90년대를 주름잡던 시네마, 깊은 철학이 담긴 뮤지엄이 되다
그렇게 방치된 채 10여 년 가까이 흘렀을 즈음, 시네마극장은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라는 이름의 미술관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아라리오뮤지엄은 주 전시관인 탑동시네마 이외에도 동문모텔Ⅰ, Ⅱ까지 총 3개의 전시장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 오래되어 방치된 건물을 예술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여기에는 ‘보존’과 ‘창조’라는 아라리오뮤지엄의 철학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Simple with soul’ 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아라리오뮤지엄의 창업자이자 컬렉터, 그리고 아티스트인 CI KIM이 이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정립한 뮤지엄의 가치이자 철학입니다. 인위적 요소를 배제하고, 옛 건물 그대로를 살려 최소한의 리노베이션만 진행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죠. 이렇게 공간과 뮤지엄의 가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지금도 그 고민을 멈추지 않는 이들이 있기에 아라리오뮤지엄이 제주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INFO]
‘제주 아라리오뮤지엄 탑동시네마’ https://www.arariomuseum.org/main.php
add.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탑동로 14
tel. 064-720-8201
hours. 10:00~19:00(월요일 휴관)
글 ⓒ어라운디
어라운디는 주변 곳곳의 문제를 기회로 디자인하는 사회혁신 디자인 기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