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장엄한 왕실 역사부터 가슴 아픈 일제 강점기,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까지 품고 있는 그릇이 있다. 뜨거운 열기와 수천 번의 망치질이 빚어낸 은은한 금빛 속 견고함을 자랑하는 우리 전통 놋그릇, 바로 방짜유기다. 이 역사 깊은 그릇을 전통 방식으로 두들기는 우리나라 유일무이한 방짜유기장 이종덕 씨와 이솔이 씨를 만나봤다. 전주 한옥마을 근처에 있는 이종덕 방짜유기 전통공예 실로 들어서자, 방을 빼곡히 채운 방짜유기와 각종 금속 전통 악기들이 반겨주었다. 로컬키트는 이곳에서 방짜 유기장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우리 전통 놋그릇의 역사도 들어볼 수 있었다.
이종덕 장인은 방짜유기는 역사적으로 독특한 구석이 많다며 말문을 열었다. 임진왜란 침략 전, 일본군들은 우리나라 기능인들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했다. 각 마을에 그릇과 도자기, 숯, 칼, 농기구 등을 만드는 장인이 있는지 확인한 뒤, 이들을 전쟁포로가 아닌 장인으로서 모셔간 것이다. 그 때문에 한국 전통 방식은 일본과 공유된 부분이 많은데 유일하게 그렇지 않은 것이 방짜유기다. 방짜유기는 임금의 밥그릇이었기에 방짜유기장 장인들은 임금의 피난에 따라가야 했고, 덕분에 이 전통은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남았다.
이와 같은 역사가 있음에도 이종덕 장인 이전, 전통의 방식만을 고수해 첫 단계부터 방짜유기 놋그릇을 완제품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사람은 전국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스스로도 처음에는 문화재에 대한 야망이나 방짜유기라는 그릇에 애정을 갖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단기 일자리 삼아 시작했으나, 진정성이 없는 종사자들의 모습에 되레 사명감이 생겼고,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어 40여 년을 바치게 된 것이다.
공정이 복잡한 방짜 만들기의 모든 기술을 터득해 내는 데만 수십 년에다, 문화재로 인정받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고 전했다. 소문을 타고 단계별 분야의 장인들을 찾아가 배우고, 기술이 사라진 부분은 옛날 책을 직접 연구하며 실마리를 따라갔다고 한다.
고군분투하며 터득한 이종덕 씨의 전통 기법은 그의 딸, 이솔이 씨에게도 전수됐다. 아버지와 같은 길을 택한 방짜유기장, 이솔이 씨와 심도 있게 이야기해 보았다.
[Q.] 금속을 배우게 되신 계기와 처음 금속을 배우겠다 하셨을 때 아버지의 반응이 궁금합니다.
아예 금속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건 은공예였어요. 제가 대학교를 패션 디자인과를 갔다가 1년만 다니고 자퇴를 했거든요. 그래서 경험을 쌓을 겸 은이나 가죽 등으로 공예를 많이 다뤘어요. 가족들 품이 그리워져서 내려온 전주에서는 제 재주를 살려서 공방을 열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은공예에서 배운 기술로 방짜유기를 이용한 액세서리를 만들기로 했죠. 아빠가 이미 방짜유기 액세서리를 만들긴 했지만 제가 현대화시키고 디자인도 더 다양하게 발전시켰어요.
제가 진득하게 한 가지를 못하는 스타일이라 어렸을 때부터 학원을 오래 다닌 적도 없었고 진로도 여러 번 바꿨어요. 아마 아빠도 그런 제가 미덥지 않지 않았을까 싶어요. 처음에는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해봐라." 하셨지만, 인터뷰나 방송에서 아빠의 속마음을 들어보면 “또 얼마나 오래갈까?” 하는 생각을 하셨대요. 그런데 저도 벌써 8년째 이 일을 하고 있네요.
[Q.] 방짜유기는 다루기 굉장히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 전체적인 제작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방짜유기가 탄생하기까지는 14번의 공정이 들어가요. 첫 단계는 구리와 주석을 녹여서 78 대 22 비율로 합금해야 해요. 저희 아버지가 대학 다니면서 논문으로 수치화시킨 황금 비율이에요. 우리 조상들도 같은 비율로 만들었을 텐데, 옛날에 쓰던 단위였기 때문에 현대화된 수치가 없었거든요.
그 다음에는 모양을 본떠 붙인 이름으로, 바둑이라는 재료로 아변을 거쳐요. 수제비 반죽처럼 단면에 기포가 없게끔, 프레스 해서 금속 안의 기공을 빼주는 작업이죠. 그 후에는 매질을 시작해요. 800도에 다다르는 가마에 재료를 넣고 계속 굴려주는 거예요. 재료가 달궈지면 빼내서 30초 내로 망치질해 주고, 식으면 다시 넣어서 굴려주는 일을 원하는 모양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요. 다 식었을 때 한 번이라도 더 망치질하면 깨져서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또 너무 달궈도 재료가 다 으스러져요.
이 과정이 끝나면, 소금물을 먹인 후, 열처리에 들어가요. 바닷가에 소금물 먹은 나무가 강하듯 놋그릇들도 소금물을 먹으면 더 견고해지기 때문에 열처리 전 꼭 거쳐줘야 하는 단계에요. 열처리가 다 되면 새까매져 있는 그릇을 ‘가질’이라는 작업을 통해 깎아내야 해요.
그러면 우리가 아는 금빛의 방짜유기 본연의 색이 나오는 거죠. 이렇게 작품하나 나오기까지, 일주일 정도 걸려요.
이처럼 긴 과정을 직접 연구하고 독학했던 이종덕 씨는 시행착오를 몸소 겪으면서 요령을 터득해야 했기에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이솔이 씨지만, 그녀는 방짜를 시작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뜨거운 불 앞을 오가며 망치질 하는 와중에도 애착을 갖고 재미를 찾으니 가능한 일이다.
[Q.] 이렇게 공을 들여 작업하시면서 느끼시는 점, 그리고 작업이 끝날 때의 감정은 어떠신가요?
일단 작업을 할 때는 무념무상이에요. 이걸 끝내겠다는 집념으로 망치질하니까, 아빠도 저도 수행하거나 도를 닦는 거 같다고 말해요. 완성하고 나면 마치 내 자식 같은 느낌이 있어요. ‘내 손에서 이게 탄생했네,’ 싶거든요. 내가 만든 작품을 보내기가 아쉽기도 한데 손님들이 좋아해 주시고 값을 치르면서 사 가시면 엄청 뿌듯하기도 해요.
[Q.] 방짜라는 재료를 재해석해서 현대화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시는 게 인상 깊은데, 그런 아이디어를 내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특별한 계기라기 보다, 저는 방짜유기가 특별하다고 인지하지도 못할 만큼 어린 시절부터 일상생활에서 늘 보고 자랐어요. 그 덕에 제 마음 한편에 항상 스며들어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살아온 인생이 다 방짜유기를 위한 밑거름이지 않았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예를 들어 대학 생활할 때도 한복 디자인을 하면서 ‘한복 액세서리를 방짜기로 하면 재밌겠다,’ 같은 생각을 하곤 했어요.
어쨌든 방짜유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젊은 층에 더 쉽게 다가가기 위함이었어요. 은공예 기술을 방짜유기에다 접목해서 박람회나 플리마켓에 나가 팔기도 했어요. 거기서 젊은 분들은 방짜유기 자체를 모르시니까, 설명해 드리면 신기해하시고 관심도 많이 가져 주시더라고요.
한 가지 일을 깊게 파고드는 것을 어려워하는 이솔이 씨의 성격이 오히려 득이 됐다. 이제까지 차곡차곡 쌓은 재주가 모여, 그녀의 색다른 경험을 방짜와 연결해 주는 다리가 된 것이다.
다재다능한 면모로 이곳저곳에서 영감을 받아 방짜유기를 널리 활용하며, 그녀는 계속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Q.] 전주에서 정착해 작업을 이어 나가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사실 우리 가족은 모두 고향이 서울이에요. 줄곧 서울에 살다가, 아무래도 문화적 가치나 전통에 대한 관심이 적다 보니 아빠 엄마가 먼저 전주에 내려와서 자리를 잡으셨어요. 처음에는 충남 부여 쪽에서 문화재를 받아보고자 문을 두드렸지만, 큰 수확이 없었고, 돌고 돌다가 문화적 가치를 가장 높게 쳐주는 곳에 정착했는데 그게 전주였어요. 그렇게 아빠께서 여기 내려온 지 4년 만에 문화재 심사를 받아, 전북 무형 문화재가 되셨죠. 그 길로 저희 언니가 먼저, 그다음은 저까지 따라 내려온 거고요.
또, 양반 도시였던 전주에는 우리나라 유일하게 길 이름에 ‘유기'가 들어가는 길이 있어요. 유기전 길이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기를 많이 만드는 동네였는데, 지금은 유기 전시관, 홍보관에 카페까지 생겼어요. 그런 전주 지역 특색에 따라가니, 전국과 해외에서도 소문을 듣고 손님들이 찾게 됐어요.
[Q.] 작업자로서 앞으로의 목표나 바람이 무엇인지, 특별한 계획이 있으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짚고 가고 싶은 부분은, 유기는 크게 주물유기와 방짜유기로 나뉘어요. 쉽게 말해 주물유기는 붕어빵처럼 거푸집에다 재료를 넣으면 뚝딱 나오는 그릇이고, 방짜유기는 말씀드린 14번의 공정을 거쳐서, 기공이 없게 두들겨 만드는 그릇이에요. 주물유기는 만들기는 쉽지만 잘 깨지고, 금속 사이 기공에 찌꺼기가 껴서 주물 결함이 생기게 돼요. 외관상으로도 잘 변색하고 몸에도 해롭고요. 소비자들은 새 물건을 봤을 때 구분이 어려우니까 백화점이나 홈쇼핑에서 잘못 구매하시고 오해를 많이 하시는데, 이 차이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전통 방식으로 만들면 그렇게 썩어들어가거나 깨질 수가 없거든요.
그리고, 제 생각에 한국 사람들은 아직 문화적 가치를 아주 높게 쳐주지 않아요. 그래서 이걸 해외로 들고 나가고 싶어요. 실제로 해외에서 굉장히 많이 오시는데 신기해서 눈을 못 떼고, 되려 더 관심을 주시거든요. 그래서 한국에서만 발전을 기다리기보다, 여건과 기회가 된다면 프랑스 메종 오브제 같은 박람회에서 세계적인 차원으로 알리고 싶어요.
사명감과 집념만으로 망치질하며 견디는 인내의 시간 끝에 탄생하기에 전통 방짜유기 작품은 더욱 빛난다. 우리나라 고유의 아름다움을 방짜유기에 한가득 담고 세계에 나가 선보일 그날까지, 로컬키트는 이솔이 씨와 그녀의 가족들을 응원한다.
글: <local.kit in 전북> 산업팀 박채린 에디터